태그 : 소설
2010/11/11   소설의 첫 문단 (2) [5]
2010/07/24   소설의 첫 문단 [4]
소설의 첫 문단 (2)
마이어 랜즈먼이 자멘호프 호텔에 투숙한 지도 어느덧 9개월이 다 되었다. 용케도 그동안은 이 호텔 투숙객 중 누구도 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누군가가 208호 투숙객, 자칭 에마뉴엘 래스커라는 유대인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 놓은 것이다.
- 유대인 경찰연합, 마이클 셰이본, 김효설 옮김, 중앙북스, 2009





1863년 5월 24일 일요일, 나의 삼촌인 리덴브로크 교수는 함부르크의 옛 시가지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동네인 쾨니히 가 19번지에 있는 작은 집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 지구속 여행, 쥘 베른, 김석희 옮김, 열림원, 2002




볼수록 신기한 광경이다. 이곳 4층 베란다에서는 고슈 가도(甲州街道)가 눈앞에 내려다보이는데, 하루에 몇 천 대나 되는 차들이 지나다니지만 사고를 일으키는 차는 한 대도 없다. 베란다 바로 밑에 횡단보도가 있는데,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면 달려오던 차들은 어김없이 정지선에 멈춘다. 그 뒤로 달려오던 차도 앞차와 거리를 두고 부딪치지 않을 정도의 위치에, 또 그 뒤에 오는 차도 같은 간격을 두고 멈춘다. 그리고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면 첫 번째 선두 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고 두 번째, 세 번째 차도 안전한 간격을 두고 이끌려가듯 뒤를 잇는다.
- 퍼레이드, 요시다 슈이치, 권남희 옮김, 은행나무, 2008




얼어붙을 듯 춥다. 여느 때와 다르게 영하 18도다. 그리고 눈이 내리고 있다. 더이상 내 모국어라 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자면, 이 눈은 카니크다. 커다랗고, 거의 무게 없는 덩어리가 되어 내리는 결정체가 흰 서리로 부서져 땅을 한 켜 뒤덮고 있다.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박현주 옮김, 마음산책, 2005




육지에 오른 후에도 바다를 잊을 수 없다.
- 해협의 빛, 쓰지 히토나리, 양억관 옮김, 고려원, 1999




간밤에 눈이 또 내렸는지 댓돌 밑에까지 눈이 쌓였다. 햇빛에 마을은 온통 은백색으로 반짝이고 멀리 안산의 삼봉도 칼칼한 겨울하늘 아래 하얀 능선을 그리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이면 한산하지만 정초에 눈이 와서 인적이 끊긴 듯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아침 잠이 많은 단비도 창이 밝아 깨었는지 어느새 눈길을 내고 거위 사료를 주고 있었다.
- 가까운 골짜기, 강석경, 민음사, 1989




산케이엔(三溪園)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택지 북쪽 끝에는 14층짜리 아파트가 늘어서 있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인데도 거의 대부분 입주가 끝난 상태였다. 아파트 한 동마다 100여 세대나 모여 살고 있었지만 주민들은 옆집 사람 얼굴조차 알지 못했다. 각각의 집들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은 밤이 되면 켜지는 불빛밖에 없었다.
- 링, 스즈키 코지, 윤덕주 옮김, 씨엔씨미디어, 1999




그날 아침, 항구에 죽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수면 위로 둥둥 떠다니는 그것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뱃전을 따라 천천히 표류했다. 주둥아리 밖으로 썩은 생선 대가리가 삐죽 튀어나왔고, 그 생선 입에서 다시 3-4 센티 정도의 끊어진 낚싯줄이 나와 있었다. 나는, 그 생선 대가리는 낚시 미끼였고 고양이가 그걸 먹으려고 물위로 몸을 숙였다가 그만 낚싯바늘이 목구멍에 걸려 중심을 잃고 물에 빠진 거라 추정했다. 내가 서 있던 항구의 물은 매우 더러웠지만 양노래기나 숭어 떼가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고 밑바닥의 자갈과 해초 속에서는 창자가 터진 곰치 사체에 치어 떼가 우글우글 달려들고 있었다. 자리를 뜨기 전 나는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수면 위의 물결을 따라 아주 천천히 좌우로 혹은 상하로 항구를 표류하는 고양이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 망설임, 장-필립 뚜생, 이재룡 옮김, 고려원, 1994




별이 쓸리는 밤이었다. 바람이 꽤 세었다. 서북지방의 밤공기가 아직 찰대로 찬 삼월 중순께였다.
- 카인의 후예, 황순원, 문학과지성사, 1994




날은 아직 완전히 밝지 않았다. 도로변에 위치한 창고 곁에는 가지를 크게 벌린 커다란 목부용(木芙蓉)이 있다. 매년 여름이 다가오면 그 나무에 하얀 꽃이 피어, 낮이건 밤이건 그 주변에 오는 사람을 흰색과 향기로 물들였다. 인부들이 오더라도 수고를 덜 수 있도록 아키유키는 혼자 창고에서 작업 도구를 꺼내어 목부용 곁에 세워둔 덤프트럭에 실었다. 아키유키의 의붓형인 후미아키가 작업반을 지휘하고 있었다. 후미아키는 항상 "도구 준비는 인부들에게 시키면 돼" 하고 말했다. 그러나 후미아키가 "일당은 그래서 주는 거니까 인부들을 편하게 해줄 필요는 없어" 하고 말해도 아키유키는 남들보다 한 시간 가량 일찍 일어나 작업 도구를 점검하고 준비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아키유키는 곡괭이와 삽이 좋았다. 그것으로 땅을 일구고 흙을 퍼낸다. 인부들을 편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고정 멤버인 열명의 인부들에게 자신이 나누어준 작업 도구로 일을 시키는 것이 지금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의붓아버지인 시게조는 그러한 아키유키를 보고 "작업반을 맡으면 후미아키보다 훌륭한 감독이 될 거야" 하고 말했다.
- 고목탄, 나카야마 겐지, 허호 옮김, 문학동네, 2001




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그리스를 정복한 왕 중 왕 필립포스의 아들, 나는 화염으로 붉게 물든 어느 날 밤 이 세상에 왔다.
- 알렉산더의 연인, 샨사, 이상해 옮김, 현대문학, 2006




건초를 실은 트럭에서 쫓겨난 때는 정오경이었다. 그 전날 밤 국경선 아래쪽에서 트럭에 훌쩍 올라탔는데, 덮개 밑에 자리를 잡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티아 후아나에서 3주일이나 보낸 뒤라 잠이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엔진을 식히기 위해 트럭을 한쪽으로 세웠을 때도 나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한 쪽 발이 비쭉이 나온 것이 트럭 운전사 일행의 눈에 띄어, 그들이 나를 트럭 밖으로 던져 버린 것이었다. 객쩍은 소리를 늘어놓아 볼까 했지만, 내 전 재산이라야 무표정한 얼굴뿐이고 보니,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는다는 것은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얻는 담배 한 대를 들고, 뭘 좀 먹을까 해서 도로를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제임스 M. 케인, 공경희 옮김, 시공사, 1996




살아있음을 증오했던 것은 아닌데, 늘 꿈속처럼 생의 모든 장면이 멀고 뿌옇기만 했었다. 많은 것들을 아주 가깝게 느끼거나 부자연스럽게 멀리 느꼈다.
- 하치의 마지막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김난주 옮김, 민음사, 2003




들쥐 가족의 가장인 프리스비 부인은 피츠기번이라는 한 농부의 채소밭에 있는 지하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집은 겨울철에 식량이 떨어지고 나무와 목초 사이에서 지내기가 힘들어지면 옮겨 오는 피신처였다. 사람들이 수확을 끝낸 후에는 콩, 감자, 완두콩, 아스파라거스 조각 등 쥐들에게 돌아올 식량이 많이 있었다.
- 니임의 비밀, 로버트 오브라이언, 임석규 옮김, 김영사, 1993




오전 10시 30분 정각에 제임스 엑커트는 리버오크 대학 구내의 스토더드 홀 앞에 차를 세웠다. 그로트월드 웨이너 핸센의 연구실은 이 건물 안에 있었다. 그러나 앤지 훠랠은 건물 모퉁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전혀 의외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 드래곤과 조지, 고든 R. 딕슨, 강수백 옮김, 시공사, 1999




'참을성 없이' 내뱉은 단 한마디의 말이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이토록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 감정의 모험, 아흐멧 알탄, 이난아 옮김, 황매, 2004




조지 채프먼한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5월 둘째 주 화요일이었다. 그는 변호사인 브라이언 콘티니한테 내 이름을 들었다면서, 사건을 맡기고 싶은데 시간 여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아마 시간이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지난 보름 동안 열아홉 살짜리 부잣집 딸을 찾아다니며 지긋지긋한 시간을 보낸 뒤끝이어서, 지금으로서는 새 고객이 전혀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수십 차례나 막다른 골목에 부닥친 끝에 마침내 보스턴 윤락가에서 매춘부로 일하고 있는 그 아가씨를 찾아냈는데, 그녀가 내게 던진 말이 고작 이랬다.
- 스퀴즈 플레이, 폴 오스터,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2000




기묘한 남자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 음양사, 유메마쿠라 바쿠, 김소연 옮김, 손안의책, 2004
by delius | 2010/11/11 23:29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5)
소설의 첫 문단
"완벽한 문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대학 시절 우연히 알게 된 어떤 작가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내가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인데, 적어도 그 말은 나에게 어떤 위로가 되어주었다. 완벽한 문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김난주 옮김, 열림원, 1996




쌍돛대 유람선 <넬리>호의 돛은 펄럭이지 않았고 배는 닻에 내린 채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멎었다. 조수는 이미 밀려들고 있었는데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다. 그래서 강 하류로 내려갈 예정이었던 배는 정박한 채 조수가 썰물로 바뀔 때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 암흑의 핵심, 조셉 콘래드, 이상옥 옮김, 민음사. 1998




언젠가 꽤 긴 시간 동안 당신이 시내 중심가의 극장 화장실에 갇히는 불운을 맛보게 된다면, 처음에는 절망감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물에 희석되고 나면 틀림없이 당신이 살아왔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당신의 일생에 극히 드물게 일어날 이런 기회를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마음의 명령을 따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살아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될 것이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폴리 델라노, 송병선 옮김, 책이있는마을, 2000




자 그럼, 다시 시내의 학교로 들어가 돈벌이에 나서볼까. 생활을 꾸려가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이 드는 건 아니지. 한달에 이백 달러 정도면 충분해. 하지만 지금은 수중에 돈이 다 떨어져가고 있고 누이한테 다시 손 벌릴 염치는 없어. 다행히도 학생들이 학기의 첫 리포트를 제출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어. 언제나 꾸준한 돈벌이가 되는 장사지. 데이비드 셀리그의 지치고 녹슬어가는 머리가 다시 한번 실력을 발휘할 때.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월의 아침에 나는 칠십오 달러 상당의 일을 잡아햐 해. 공기가 맑고 상쾌하군. 고기압 세력이 뉴욕을 덮고 있어서 습기와 안개라곤 찾아볼 수 없어. 이런 날씨라면 나의 시들어가던 힘도 다시 활개를 칠 테지. 그럼 아침의 기운이 하늘에 충만한 이때 너와 나 함께 출발해보는 거야. 브로드웨이-IRT 지하철을 향해. 표는 준비됐겠지?
- 다잉 인사이드, 로버트 실버버그, 장호연 옮김, 책세상, 2005




가장 좋아하는 꽃은 프리지어였다. 청결한 향이 난다고 생각한다. 도우코는 프리지어에 시호와 스톡을 곁들여 초록색이 풍성한 꽃다발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 장미 비파 레몬, 에쿠니 가오리, 김난주 옮김, 소담출판사. 2008




성에서 하룻저녁 하룻밤을 묵고픈 욕구가 우리를 사로 잡았다. 많은 성들이, 프랑스에서는, 호텔이 되었다. 푸르름 없는 추함의 광막함 속에 한 조각 사각의 푸르름, 광대한 도로망 속의 한 조각 오솔길, 나무들, 새들. 나는 자동차를 몰고 있고, 백미러를 통해 내 뒤의 자동차를 관찰한다. 왼쪽의 작은 등이 깜빡거리고 있으며 자동차 전체가 조바심의 전파를 보내고 있다. 저 운전수는 나를 추월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맹금이 참새를 노리듯이 그 순간을 노리고 있다.
- 느림, 밀란 쿤데라, 김병욱 옮김, 민음사, 1995




당신 앞에 서면, 언제나 묘하게 불편합니다. 미용실에서 점원이 머리를 감겨줄 때마다 물의 온도를 가지고 불평을 하는 나에게 친구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이곤 해요. "이제 좀 그만 좀 해라"라는 핀잔을 들을 만큼.
- 에밀리, 타케모노 노바라, 기린 옮김, 두드림, 2005




사람들이 아주 다른 말을 쓰던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 따뜻한 나라들에는 크고 화려한 도시들이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는 왕이 사는 궁전이 우뚝 서 있고, 넓은 도로와 좁은 길과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있었다. 황금과 대리석으로 조각된 신의 상이 서 있는 웅장한 사원도 있고, 세계 곳곳의 왕국에서 들여온 온갖 다채로운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시장도 있었으며, 사람들이 새로운 일을 이야기하고, 연설을 하거나 듣기 위해 모였던 넓고 아름다운 광장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에는 극장이 있었다.
- 모모, 미하엘 엔데, 한미희 옮김, 비룡소, 1999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김경은 옮김, 두레, 2002




레이첼 린드 부인은 에이번리 마을의 큰길이 작은 골짜기 속으로 비탈져 내려가는 큰길 가에 살고 있다. 이 큰길을 따라 금낭화와 오리나무가 늘어서 있고, 멀리 커스버트네 숲 속에서 흘러나오는 시내가 이 길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 시내는 상류에서는 은밀한 신비의 샘과 작은 폭포를 이루며 꾸불꾸불 세차게 흐르지만, 린드 부인네 골짜기에 이르면 물길이 제대로 잡혀 졸졸 흐르는 작은 개울이 되었다. 아무리 시내라도 레이첼 린드 부인네 집 앞을 지날 때는 예의와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아니면 린드 부인이 창가에 앉아, 이를테면 시냇가에서 올라오는 아이들이라든가 집 앞을 지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꼼꼼히 살피고 색다르거나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을 보면 그 까닭은 확실하게 알아낼 때까지 가만 있지 않으리란 점을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 빨간 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김경미 옮김, 시공주니어, 2002




끝이 시작되고 있었다. 영겁만큼이나 길게 느껴진 시간이 흐른 후에.
- 앰버 연대기-1 앰버의 아홉 왕자, 로저 젤라즈니, 김상훈 옮김, 예문, 1999




지금까지 나는 이 이야기를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고, 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남들이 믿지 않을까봐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게다가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얘기해 버리면 나 자신도 이야기 자체도 아주 값싼 것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여름 캠프에서 소등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에 교사가 들려주는 귀신 이야기보다 나을 게 전혀 없는, 아주 시시한 이야기가 되어 버릴 것이라고. 내 입으로 말하고 그것을 내 귀로 듣게 되면 나 자신마저도 믿지 않게 되고 말것도 같았다.
- 총알차 타기, 스티븐 킹, 최수민 옮김, 문학세계사, 2001




내 나이 열다섯이던 해에 나는 간염에 걸렸다. 나의 병은 그해 가을에 시작되어 다음 해 봄에 끝났다. 묵은해의 날이 점점 더 추워지고 어두워질수록 나의 몸은 자꾸만 약해져갔다. 새해가 되면서 비로소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1월은 따뜻했고, 어머니는 나를 위해 침대를 발코니에 내다주었다. 하늘과 태양과 구름을 바라보고 있으면 뜰에서 노는 아이들 소리가 들려왔다. 2월의 어느 초저녁에는 지빠귀 노랫소리도 들렸다.
- 더 리더, 베른하르트 슐링크, 김재혁 옮김, 이레, 2004




1965년 7월, 나는 새로 산 샌들을 신고, 인생에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숨어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곧 내 남편이 될 윌리엄을 만났다. 그때 우리는 54번가와 6번가가 마주치는 길모퉁이에서 문독과 말을 나누고 있었다. 초저녁이었다. 하늘은 환히 빛나고 있었다. 갓 스물이었던 나는 알려진 세계의 아름다움에 아직도 쉽사리 그리고 자주 깜짝 놀라곤 했다. 가죽 헬멧을 쓴 문독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땀방울이 반짝반짝 빛났다.
- 세월의 계단, 제인 샤피로, 김석희 옮김, 동문사, 1992




불태우는 일은 즐겁다.
- 화씨 451, 래이 브래드버리, 강창래 옮김, 성무, 1992
by delius | 2010/07/24 12:13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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