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소설
2011/09/09   소설의 첫 문단 (8) [4]
2011/07/24   소설의 첫 문단 (7) - 포와로 등장 소설 [4]
2011/05/10   소설의 첫 문단 (6) [6]
2011/04/21   소설의 첫 문장 (5) - in English [4]
2011/04/12   소설의 첫 문단 (4) [2]
2010/12/18   소설의 첫 문단 (3)
소설의 첫 문단 (8)
콜필드의 여름밤은 정말 기분이 좋다. 헬리오트로프와 재스민, 그리고 인동덩굴과 클로버의 향기가 난다. 이곳에서는 별빛도 따스하고 부드럽다. 전에 있던 곳처럼 차갑거나 쌀쌀하지는 않다. 아주 낮게 우리들 가까이에서 빛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열어젖뜨린 창문의 커튼을 흔드는 미풍은 갓난아기의 입맞춤처럼 부드럽고 촉촉하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면 무성한 나뭇잎들이 자다가 몸을 뒤척이고, 다시 잠에 빠지는 것처럼 서로 스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푸른 잔디밭 위를 흐르며 잔디를 자른 흔적을 또렷이 드러내고 있다. 그곳에는 정적이, 완전한 평화와 평온함과 고요가 있다. 정말 콜필드의 여름밤은 기분이 좋다.
- 죽은자와의 결혼(1948), 윌리엄 아이리시, 김석환 옮김, 해문출판사, 1992




이것은 내가 낡은 가죽 트렁크를 되찾을 때까지의 이야기다.
-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2000), 온다 리쿠, 권남희 옮김, 북폴리오, 2007




나는 마침내 저 엄청난 불행과 상실의 시기에서 이제 막 벗어나는 참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람들이 모진 고통이라든가 영육의 파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은 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적은 없었다. 잃는다는 것. 잃었다는 것. 이러한 어둠은 기껏해야 몇 분, 아니 몇 시간 지속될 뿐이며, 모두가 그렇듯이 이들 낙담한 사람들 역시 그 사이사이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저 행복의 단일함을 맛보면서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행복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행복이란 머릿속에 지니고 다니는 행운의 창유리 같은 것이다. 행복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갖 기지를 다 발휘해야 하며, 일단 그것이 깨지고 나면 전혀 다른 삶으로 옮아가지 않을 수 없다.
- 가장 가깝지만 가장 알 수 없는 그녀(2002), 캐럴 실즈, 한기찬 옮김, 민음사, 2009




……………부우―――――――――――웅웅웅――――――――――――웅웅웅웅…………….
내가 거슴츠레 눈을 떴을 때 마치 꿀벌이 윙윙거리는 듯한 울림은 탄력 있는 긴 여운을 남기며 하염없이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 도구라마구라(1935), 유메노 큐사쿠, 이동민 옮김, 크롭씨클, 2008




40번째 맞는 생일날, 도냐 루끄레시아는 베개 위에 깜찍한 편지 한 통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편지에는 애정이 듬뿍 담긴 예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 궁둥이(1988), 바르가스 요사, 정동창 옮김, 열린세상, 1994




마스 아라이는 모형 스팸 깡통이 탑재된 슬롯머신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70여 년을 살아오면서 그는 자주 포커와 블랙잭을 즐겨 왔다. 마스가 보기에 슬롯머신은 늘어진 티셔츠에 귀걸이를 한, 주책없는 뚱뚱한 백인 여자들에게나 어울리는 게임이었다. 또한 그가 생각하기에 스팸은 음식이었다. 기름이 자르르하게 구운 다음, 네모로 얇게 썰어 찰진 밥과 함께 말린 김으로 묶어 놓은 먹음직스러운 음식일 뿐이었다. 그건 LA에 사는 일본인들의 스팸 요리법이었다.
- 스네이크 스킨 샤미센(2007), 나오미 히라하라, 안인옥 옮김, 황매, 2009




60년이 지난 지금도 가짜 경감 듀의 비밀을 푼 사람은 없다.
- 가짜 경감 듀(1983), 피터 러브시, 강영길 옮김, 동서문화사, 2003




어느덧 교장의 연설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기분 좋은 암고양이처럼 가르랑댔다. 성능 좋은 마이크가 그 작은 소리까지 고스란히 운동장 곳곳에 전달시켰다. 학교와 이웃한 아파트의 부녀회에서 볼륨을 좀 낮춰달라는 항의가 있고부터는 최대한 볼륨을 줄여놓았지만 대신 교장의 목소리에는 더욱 힘이 실렸다.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간 자신의 목소리가 사이를 두고 운동장 양쪽 모서리에 달아놓은 두 개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을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는 마이크에 대고 지금 하고 있는 말과 방금 전 흘려보낸 스피커를 통해 나오고 있는 말이 서로 겹쳐지지 않도록 한 자 한 자 적당한 사이를 두고 또박또박 발음하려 최선을 다했다. 그는 우리말을 사랑했다. 특히 경음과 연음에 신경을 써서 발음하려 했다. 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이 '소적새'라고 불리는 것은 알지 못했다.
- 내 영화의 주인공(2001), 하성란, 작가정신, 2001




"눈이 평소에도 이런 색입니까?"
- 오늘밤 모든 바에서(1991), 나카지마 라모, 한희선 옮김, 북스피어, 2009




우리는 여태껏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밭 세 군데를 내달렸다. 줄곧 내리막길이었다.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그러다가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처음 와본 곳이라 어디가 위험한 곳인지를 알지 못했다.
- 1월 0일(1995), 바르트 무이아르트, 한경희 옮김, 낭기열라, 2010




내 존재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다루지 않았으면 한다. 내게는 의지도 있고 감정도 있다. 게다가 믿기 힘들겠지만 자존심도 있다. 인간의 혈액 속에 자리잡고 산다는 습성이 공포감을 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대체 어떻단 말인가. 누구나 어딘가에 정착해 살고 있다. 물고기가 바다나 강에 살듯이. 사자가 아프리카의 대지에 살듯이. 증오나 애정이 사람의 마음에 살듯이. 정착할 곳을 찾기 위해서는, 항상 눈에 띄지 않게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내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까지 온갖 곳을 떠돌아왔다. 닳고닳은 여자의 핏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기도 하고, 에이즈 바이러스와 싸우거나(특히 녀석들은 최악이다. 자신들의 확고한 의견이 전혀 없다) 병 속에 갇혀 지냈던 적도 있는 것이다. 때로는 영양부족으로 다 쓰러져가고, 때로는 중성지방에 짓눌리고, 비로소 나는 그녀, 재스민을 만났다.
- 애니멀 로직(1996), 야마다 에이미, 유인경 옮김, 태동출판사, 2001




추석을 지나 이윽고 짙어가는 가을해가 저물기 쉬운 어느날 석양.
- 태평천하(1948), 채만식, 창작과비평사, 1994




아오야마 시게루[靑山重治]가 재혼을 결심한 것은 아들 시게히코[重彦]가 "재혼이라도 하는 게 어때요"하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 오디션(1997), 무라카미 류, 권남희 옮김, 무당미디어, 1998




틀로크웽가(街) 스피디 모터스의 사장 J.L.B. 마테코니 씨는 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를 세운 유능한 탐정 음마 라모츠웨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두 번째 청혼이었다. 맨 처음, 엄청난 용기를 내어 결혼해 달라고 청했을 때는 거절당하고 말았다. 아주 상냥하게,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거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절은 거절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마테코니 씨는 그녀가 재혼할 생각이 없다고 생각했다. 트럼펫 주자이자 재즈광이었던 노트 모코티와의 짧은 결혼 생활이 파경을 맞은 후, 그녀는 결혼이란 슬픔과 괴로움을 가져다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자기 일과 제브라가(街)에 편안한 자기 집을 가진 독립적인 여성이었으니 말이다. 남자와 결혼 약속을 하고, 일단 남자가 그녀의 집에 눌러앉게 되면 제멋대로 굴지도 모르는데, 그녀 같은 여성이 결혼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가 음마 라모츠웨의 입장이라면, 아무리 자신처럼 착실하고 존경할 만한 상대가 청혼한다 할지라도 거절할 만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 기린의 눈물(2000), 알렉산더 매콜 스미스, 이나경 옮김, 북@북스, 2004




이제 됐다.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다 쌌다. 맨벽들과 쌓아놓은 상자들이 방 두 개를 더 작아보이게 하고, 천장을 더 낮아 보이게 하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 공간에서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을까?
- 금요일 저녁(1998), 엠마뉴엘 베른하임, 이원희 옮김, 작가정신, 1998
by delius | 2011/09/09 01:13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4)
소설의 첫 문단 (7) - 포와로 등장 소설
'스타일즈 저택의 사건'으로 당시 세간에 일었던 격심한 관심은 이제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사건에 따랐던 엄청난 구설수 때문에 줄곧 나는 친구인 포와로와 스타일즈 저택의 식구들로부터 그 사건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아 왔다. 나는 이 글이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항간에 떠돌고 있는 불미스러운 소문들을 진정시켜줄 것이라고 믿는다.
-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1920), 애거서 크리스티,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1992




나는 소설의 첫머리를 강력하고 기발하게 하여 미사여구에 지친 독자들의 주의를 끌려는 젊은 작가들이, "'제기랄!'하고 공작 부인이 말했다."라는 식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이 꽤 효과적이라고 믿고 있다.
- 골프장 살인사건(1923), 애거서 크리스티,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1992




페라즈 부인은 목요일인 9월 16일과 17일 밤 사이에 죽었다. 나는 17일, 곧 금요일 아침 8시에 그곳에 도착했다. 시체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녀는 몇 시간 전에 죽은 것 같았다.
- 애크로이드 살인사건(1926), 애거서 크리스티, 유명우 옮김, 해문출판사, 1986




자정이 임박할 무렵 한 남자가 콩코드 광장을 걷고 있었다. 멋진 털외투가 그의 빈약한 체구를 감싸고 있었지만, 어딘지 음울한 인상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 푸른 열차의 죽음(1928), 애거서 크리스티,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1991


영국 남부에 있는 해변 도시글 중 세인트 루만큼 매력적인 곳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해수욕장의 여왕'이라는 기막히게 좋은 이름이 붙은 그곳은 리비에라를 생각나게 해주는 것이 있었다. 그 콘윌 해안은 어느 보로 보아도 프랑스 남부 지방의 해안만큼이나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 엔드하우스의 비극(1932), 애거서 크리스티, 유명우 옮김, 해문출판사, 1993




시리아의 어느 겨울 아침 5시. 알레포 역에는 토로스 급행 열차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써 있는 기차가 정차해 있었다. 그것은 요리실 겸 식당차 한 량과, 침대차 한 량, 그리고 지방 열차 두 량으로 되어 있었다.
- 오리엔트 특급살인(1934), 애거서 크리스티, 유명우 옮김, 해문출판사, 1991




9월의 햇살이 르부르제 공항에 따갑게 내리쬐는 가운데 승객들은 지면을 가로질러 잠시 뒤 크로이든 공항을 향해 출발한 예정인 정기 여객기 프로메테우스호에 올라탔다.
- 구름 속의 죽음(1935), 애거서 크리스티, 김석환 옮김, 해문출판사, 1991




"포와로씨!"
- 테이블 위의 카드(1936), 애거서 크리스티, 김석환 옮김, 해문출판사, 1986




"리넷 위지웨이야!"
- 나일강의 죽음(1937), 애거서 크리스티,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1989




에르큘 포와로는 방금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온 젊은 여성을 감상이라도 하듯이 관심을 가지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 회상 속의 살인(1942), 애거서 크리스티, 서남희 옮김, 해문출판사, 1991




금요일 아침 6시 13분에 루시 앙카텔(Lucy Angkatell)은 크고 파란 눈을 반짝 떴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즉시 잠에서 완전히 깨어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난 밤에 할로 저택에 도착한 그녀의 젊은 친척인 하드캐슬에게 생각이 미치자, 그녀와 의논하기 위해 레이디 앙카텔은 재빨리 침대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여전히 우아한 어깨 위해 실내복을 걸치고 복도를 따라 미지가 자고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레이디 앙카텔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의 생각이 빨리 진행되는 여자였기 때문에, 늘 그렇듯이 오늘도 그녀는 그 풍부한 상상력으로 미지의 대답까지도 미리 생각해 가면서 마음속으로 미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고 있었다.
- 할로 저택의 비극(1946), 애거서 크리스티, 김교향 옮김, 해문출판사, 1988




랜스콤 노인은 비척이는 걸음걸이로 방들을 돌아다니면서 창문의 블라인드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그는 가끔씩 눈살을 찌푸린 채 물기어린 눈으로 창문 밖을 흘끗거렸다.
- 장례식을 마치고(1953), 애거서 크리스티,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1988




전화를 받은 사람은 포와로의 유능한 여비서 레몬 양이었다.
- 죽은자의 어리석음(1956), 애거서 크리스티, 나승덕 옮김, 해문출판사 ,1988




에르큘 포와로는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초콜렛 잔이 들려 있었다. 그는 단것을 아주 좋아해서 초콜렛과 함께 브리오슈를 먹었다. 그건 초콜렛의 맛과 아주 잘 어울렸다. 그는 음식 맛이 자기 입에 맞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빵은 그가 네 번째로 들른 가게에서 어렵게 구한 것이었다. 덴마크식으로 만들어진 빵이었지만, 겉만 그럴 듯하게 꾸며놓은 프랑스식 빵보다는 멋이 훨씬 좋았다.
- 세번째 여자(1966), 애거서 크리스티, 김석환 옮김, 해문출판사, 1989




올리버 부인은 함께 지내는 친구인 주디스 버틀러와 함께 그날 저녁 열리기로 되어 있던 10대 청소년들의 파티 준비를 도우려고 집을 나섰다.
- 핼로윈 파티(1969), 애거서 크리스티, 임경자 옮김, 해문출판사, 1991
by delius | 2011/07/24 11:16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4)
소설의 첫 문단 (6)
17번가와 브로드웨이가 만나는 교차로의 신호등은 아직 빨간 색이었다. 하지만 성급한 노란 택시들은 그 좁은 도로를 먼저 지나겠다고 앞다투어 빵빵거렸다. 나는 지금 이렇게 복잡한 도심을 헤치며 운전하고 있다. 클러치, 액셀, 변속기(중립에서 1단인가? 1단에서 2단인가?), 클러치 떼고.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지만 안정이 되지 않았다. 끽끽 브레이크를 밟아대는 차의 홍수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몰고 있는 작은 차는 교차로를 지나는 동안 두어 번이나 덜커덕거리며 비틀댔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덜커덕거리던 차가 제자리를 잡더니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발랐다. 눈으로 확인해보니 기어는 겨우 2단에 있는데 앞 택시 뒷부분이 어찌나 크게 보이던지…… 다급한 나머지 브레이크를 확 밟아버렸다. 툭, 구둣굽이 부러졌다. 이런 젠장! 7백 달러짜리 구두 한 짝이 또 희생되는군. 이번 달에만 벌써 세번째다. 그나마 차가 멈춰서 다행이었다. 마놀로 구두를 벗어 조수석으로 던져버릴 시간이 몇 초 생긴 거니까. 그나마도 빵빵대는 클랙슨 소리와 사방에서 날아오는 온갖 욕설을 못 들은 척 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땀에 젖은 손을 닦을 데라곤 마지막 단추를 채우자마자 허벅지와 엉덩이를 조이며 몸에 꽉 끼는 구찌 스웨이드 바지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허벅지를 감고 있는 부드러운 스웨이드에 땀을 닦고 말았다. 점심시간에 8만 4천 달러짜리 수동 컨버터블을 몰고 사방이 장애물인 미드타운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려니 신경이 곤두섰다. 담배가 땡겼다.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로렌 와이스버거, 서남희 옮김, 문학동네, 2006




기분 나쁜 꿈을 꾸었다.
- 얼굴에 흩날리는 비, 기리노 나쓰오, 권일영 옮김, 비채, 2010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하지만 밤의 공기는 달콤한데 비해 그의 기분은 씁쓸했다. 벌레라도 씹은 듯이 잔뜩 찌푸린 그의 표정은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늘에 가득차 있고, 때로는 몇 시간이나 가슴에 뿌리박혀서 도무지 풀리지 않는 그런 처치곤란한 울분이었다. 그것은 또 주위의 모든 것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어서 매우 보기 흉한 느낌이 들었다. 주위 일대의 정경 중에서 그것만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 환상의 여인, 윌리엄 아이리시, 최운권 옮김, 해문출판사, 1989




너는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벌써 몇 장째 팔각시계를 그리고 있었다. 마지막 것은 바늘은 없고 문자판뿐이다.
- 턴, 기타무라 가오루, 이재오 옮김, 황매, 2009




정신이 들어 보니 오다기리는 겨우 한 사람이 지날 수 있을 것 같은, 숲 속의 짐승이나 다니는 좁은 길을 휘청거리며 걷고 있었다. 꿈에서 금방 깨어난 것 같기도 하고 혹은 한밤중에 한번 잠이 깼다가 이제까지 꾸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혹은 한밤중에 한번 잠이 깼다가 이제까지 꾸고 있었던 꿈 속으로 다시 들어간 것 같기도 한 그런 기분이었다. 길은 진창이 되어 있어서 스니커에는 질퍽질퍽하고 더러운 흙탕물이 스며들어왔다. 지독히 춥다. 의식이 몽롱한 것은 이 추위 탓도 있어, 하고 오다기리는 생각했다. 자신이 걷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 것은 겨우 2, 3분 전이었다. 앞에도 뒤에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다기리의 앞에서 걷고 있는 것은 커다란 배낭을 걸머진, 체격을 봐서 판단하면 남자인 듯했다. 한 번 이쪽을 돌아보았지만 얼굴은 알 수 없었다. 주위가 나뭇잎에 덮여서 어둡기 때문은 아니다. 그 남자는 방독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다.
- 오분 후의 세계, 무라카미 류, 이창종 옮김, 웅진출판, 1995




남자는 포마드를 잔뜩 바른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매끈하게 가다듬었다. 예술의 규칙 안에서 희생자와 맞닥끄리기 위해서는 우선 그럴듯하게 보여야만 하는 법.
- 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 성귀수 옮김, 문학세계사, 2002




끝없이 줄줄이 완만한 경사로 이어져 있는 언덕길을 끝까지 올라가면, 목적지인 교고쿠도[京極堂]가 있다.
- 우부메의 여름, 교고쿠 나츠히코, 김소연 옮김, 손안의책, 2004




노오랗게 피었던 장충단 공원의 개나리는 지기 시작한다. 공원 주변의 언덕과 산비탈에 꽉 들어앉은 소쇄한 양관洋館들, 그 형형색색의 양관들의 담 너머로부터 마치 쏟아져 나온 듯한 라일락, 벚나무, 은행나무, 또는 줄장미 그 밖의 여러 가지 수먹에는 새순이 돋아나서 아스름한 연둣빛을 자아내고 있다. 그 연한 푸르름 위로 청자색 아지랑이가 흔들리면서 봄은 눈부신 햇빛 아래 무르익어 가는 것이다. 아니 봄은 벌써 노곤한 자태로 행복과 권태에 겨운 것같이도 느껴진다.
- 성녀와 마녀, 박경리, 인디북, 2003




내 귀의 저 안쪽, 고막 가까이에는 제법 성능이 괜찮은 은색의 소리굽쇠가 꽂혀 있다. 그 소리굽쇠가 갑자기 울렸다. 나는 재일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파이프 침대를 삐걱거리며 천천히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 때문에 귀에 꽂혀 있던 광석 라디오의 이어폰이 쏙 빠져나와 바닥에서 3센티미터 정도의 높이에서 진자처럼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 게르마늄의 밤, 하나무라 만게츠, 양억관 옮김, 씨엔씨미디어, 1999




객실, 객실 그리고 또 객실.
- 우리 모두 잘못이다, 알베르트 바스케스 피게로아, 정구석 옮김, 책세상, 2005




우리는 언젠가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을 더 많이 알게 된다.
- 시티즌 빈스, 제스 월터, 이선혜 옮김, 영림카디널, 2008




퀸 아파트의 낡은 테이블에 다섯 사람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 중에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눈빛이 날카로운 헨리 샘프슨 지방검사의 모습도 보였다. 샘프슨 옆에는 뉴욕 경시청의 마약반장인 살바토레 피오렐리가 심술궂은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그는 몸집이 큰 이탈리아 사람으로 오른쪽 볼에는 검게 칼자국이 나 있었다. 샘프슨의 보좌관인 붉은 머리의 티모시 크로닌의 얼굴도 보였다. 리처드 퀸 경감과 엘러리 퀸은 서로 어깨를 기대고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은 전혀 달랐다. 경감은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엘러리는 피오렐리의 상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프랑스 파우더의 비밀, 엘러리 퀸, 이제중 옮김, 시공사, 1994




월요일 아침이었다.
- 날라리 on the pink, 이명랑, 세계사, 2008




미키코[幹子]의 방은 그녀 스스로 내뿜는 긴장과 분도의 열기 때문에 공기가 흐려져 있었다. 거울에 얼굴을 가까지 대고 미키코는 작은 펜슬 루주로 입술을 덧칠했다. 뜨거운 샤워를 하고 나온 몸은 달아올라, 아깨를 타고 미끄러지는 슬립 끈 아래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콧등에 솟은 작은 땀방울을 바닥에 떨어져 있던 베스타월로 닦아내고 그 참에 벗겨진 파운데이션은 화장용 스펀지로 다시 발랐다.
- 꿈을 주다, 와타야 리사, 양윤옥 옮김, 중앙북스, 2007




늘 그렇지만, 쥐는 생각보다 몸집이 크다.
- 베누스의 구리 반지, 린지 데이비스, 정회성 옮김, 황금가지, 2005
by delius | 2011/05/10 14:27 | underline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소설의 첫 문장 (5) - in English
Nearly all Americans above a certain age can recall where they were the moment they learned of the assassination of John F. Kennedy.
- Corruption of Blood by Robert K. Tanenbaum, 1996




Murderers do not usually give their victims notice.
- A Certain Justice by P. D. James, 1997




Aaron Winslow would never forget the next few minutes.
- 2nd Chance by James Patterson, 2003




On the sixtheenth of October, shadowy deer crept to the edge of dark woods beyond my window as the sun peeked over the cover of the night.
- The Body Farm by Patricia Cornwell, 1995




To every hour, its mystery.
- Sacrament, Clive Barker, 2005




Whenever my morther talks to me, she begins the conversation as if we were already in the middle of an argument.
- The Kitchen God's Wife by Amy Tan, 1992




If you want to really hear about it, the first thing you'll probably want to know is where I was born, and what my lously childhood was like, and how my parents were occupied and all before they had me, and all that David Copperfield kind of crap, but I don't fell like going into it, if you want to know the truth.
- The Catcher in the Rye by J. D. Salinger, 1969




"Where's Papa going with that ax?"
- Charlotte's Web by E. B. White, 1980




It was between seven and eight o'clock on a March evening, and all over London the bars were drawn back from pit and gallery doors.
- Man in the Queue by Josephine Tey, 1995




Mr. and Mrs. Beresford were sitting at the breakfast table.
- By the Pricking of My Thumbs by Agatha Christie, 1968




1971. Bruce Springsteen wasn't famous in 1971.
- Chase. by Dean Koontz, 1984




He seemed incapable of creating such chaos, but much of what he saw below could be blamed on him.
- The Pelican Brief by John Grisham, 1993




What I seek to do here perhaps cannot be done in words.
- Violin by Anne Rice, 1997




The land around Sydney and Alicia Bartleby's two-storey cottage was flat, like most Suffolk country.
- A Suspension of Mercy by Patricia Highsmith,1980




Jack Torrance thought: Officious little prick.
- Shining by Stephen King, 1978




p.s. 첫문장은 대부분 짧군요 :-)
by delius | 2011/04/21 00:31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4)
소설의 첫 문단 (4)
내가 지금보다 더 어리고 상처받기 쉬웠던 시절에 아버지가 충고를 해주신 적이 있는데, 나는 그때 이래로 그 말씀을 마음 속에 되새겨 왔다.
- 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이만식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이 냉장고의 전신은 훌리건이었을 것이다.
- 카스테라, 박민규, 문학동네, 2005




"외할아버지, 시간 없어요!" 내가 소리쳤다. "우리 오늘 저녁에 축하파티 할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손을 흔들었다. 내 말을 듣지는 못한 것 같았다. 외할아버지는 다른 노인들과 볼링을 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죽마고우도 몇 명 섞여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공을 굴릴 차례였다. 외할아버지는 공을 가슴에 안고 까만 출발선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무릎을 구부려 포즈를 취하자 바지 끝이 올라갔다. 그 바람에 빨간 양말이 힐끗 드러났다. 왠지 생뚱맞아 보였다. 외할아버지는 볼링공을 굴리고 나서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굵게 주름진 양손이 홀가분해 보였다. 볼링공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부드러운 잔디밭 위로 굴러가 핀을 맞혔다. 외할아버지가 어린애처럼 활짝 웃었다.
- 할머니의 연애시대, 벌리 도허티, 선우미정 옮김, 창비, 2007




화면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나딘은 '빨리감기' 버튼을 눌러 첫머리 자막을 재빨리 넘겨버렸다. 그것은 구형 비디오이고, 리모컨도 없다.
- 베즈 무아, 비르지니 데팡트, 최경란 옮김, 책세상, 200




상강(霜降)이 엊그제 지난 탓인지 끄무레한 새벽이면 제법 날이 선 무서리가 변소 뒤쪽의 멀쑥한 피마자 이파리에 내려앉았다. 비록 이피리라곤 성한 게 몇 장 안 남았을 정도로 심란한 쑥대머리 형상을 뒤어쓰곤 있지만 뿌리내린 터가 워낙 걸쭉해서 그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씨방만큼은 아이들의 옹골찬 낭심처럼 뿌듯하게 영글어 강낭콩만한 알록달록한 피마자씨가 열렸었다. 아랫집 혜정이 엄마가, 자기집 애들이 횟배를 앓는다며 정작 피마자씨를 돌 틈에 박아 넣어 싹을 틔우게 한 끝방 최씨의 마누라인 나주댁하고는 한마디 상의조차 없이 건너뛰고 주인집인 장석조 씨 마누라에게 말을 넣어 도거리로 훓어 가는 바람에 한바탕 드잡이까지 갈 뻔한 동티가 나기도 했다.
- 장석조네 사람들, 김소진, 고려원, 1995




2월의 첫 번째 일요일, 스이도바시 역에서 도보로 4, 5분 정도에 위치한 공민관에서 열린 '범죄 피해자 가족의 모임'은 50명 정도가 출석해 저녁 5시에 시작했다.
- 제물의 야회, 가노 료이치, 한희선, 이미지박스, 2008




리스본 어느 광장에 가면 한가운데에 루시타니안 사이프러스(그러니까 포르투갈 사이프러스)라고 부르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나무의 가지들은 하늘을 향하지 않고 밖으로 평평하게 뻗어 나가도록 가꿔 놓았기 때문에 햇살도 빗방울도 뚫지 못할 직경 이십 미터의 거대한, 그리고 아주 나지막한 우산 모양을 하고 있다. 백 명은 너끈히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다. 비틀리고 육중한 나무줄기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는 쇠 버팀대가 가지를 받치고 있다. 수령은 최소한 이백 년이 넘었다. 그 옆의 공공 게시판에는 지나는 이들을 위한 시 한 편이 적혀 있다.
- 여기, 우리가 만나는곳, 존 버거, 강수정 옮김, 열화당, 2006




초록색과 노란색 깃털의 앵무새 한 마리가 문밖에 걸어놓은 새장 속에서 쉬지 않고 되풀이해 지저귀고 있었다.
- 이브가 깨어날 때, 케이트 쇼팬, 이소영 옮김, 열림원, 2002




총소리에 놀라 잠을 깬다. 어림짐작으로도 열 발 이상을 연속으로 발사하는 소리다. 아니 그것은 정확지 않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이 새어들고 있는 내 방에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는 총소리의 여운을 계산한다면 열 발 이상이라는 느낌이 착각일 수도 있다. 난 벌떡 일어나 머리맡에 놓아둔 권총을 급히 집어들고 장전을 한다. 안전 장치는 풀어져 있는 상태였다. 슬라이드를 뒤고 당길 때의 철커덕 하는 경쾌한 소리와 검은색 베레타의 그 묵직함이 나를 안정시켜 주었다. 숨을 크게 몰아쉬고 정신을 수습하려 애를 써본다. 아직도 총소리의 메아리에 귀가 멍멍한 듯했다. 어쨌건 꽤 많은 수의 총알이 발사된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K-2 따위의 소총을 자동으로 놓고 드르륵 갈겨버린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M-9 베레타나 K-5 등의 오토로더 식의 소구경 권총이나 몇십 년 전에나 사용되었음직한 리볼버 식의 K-45 구경을 힘겹게 노리쇠를 당겨가며 연속으로 발사하는 소리였다. 만약 열 발 이상이라면 45 구경은 아닐 것 이다. 기껏해야 약실에 한 발 더 장탄한다 해도 6+1 이상을 잴 수 없는, 지금에 와선 구경하기도 힘든 것이 K-45 구경이 아니던가.
- DMZ, 박상연, 민음사, 1997




'가발 미용실 2호점'의 점장 가쓰라 고조는,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은 열심히 잘라주면서 정작 자기는 가발을 쓰고 다닌다. 가발이라는 티가 너무 확실하게 나기 때문에, 손님들은 가발을 쓰는 게 콘셉트인 미용실인가? 하고 생각하곤 한다. 한번 자세하고 물어보고 싶지만 가발 얘기 같은 건 왠만해서는 본인에게 묻지 않는 게 예의다.
- 가발 미용실 2호점, 야마자키 나오코라, 서혜영 옮김, 민음사, 2010




1759년 9월 29일 해가 질 무렵, 칠레 해안으로부터 약 600킬로미터 떨어진 바다에 위치한 후안 페르난데스 군도(郡島) 지역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졌다. 버지니아 호의 선원들은 갑판에 모여 배의 돛대와 활대 끝에서 타오르는 작은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대기에서 생성되는 전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격렬한 뇌우를 예고하는 '생텔름'이라는 불꽃이었다. 다행히도 로빈슨이 타고 있는 버지니아 호는 두려워할 게 - 가장 격렬한 폭풍우조차도 - 전혀 없었다. 이 배는 네덜란드 국적의 연안 어선이었는데, 돛대가 상당히 낮고 육중해서 빠른 속력을 낼 수는 없었지만 그 어떠한 악천후에도 끄떡없을 만큼 안전했다.
- 로빈슨과 방드르디, 미셸 투르니에, 이원복 옮김, 좋은벗, 2004




규진이 봉투를 꺼내 내게로 던졌다. 속에는 청첩장이 들어 있었다.
-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만교, 민음사, 2000




프랑스 전역의 중앙 형무소 가운데 유난히 마을을 끄는 곳이 퐁트브로 형무소이다. 그곳은 나에게 다른 어느 곳보다 슬픈 인상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다른 형무소들은 잘 알고 있는 죄수들까지 퐁트브로라는 이름만 듣고도 나처럼 고통스러운 마음의 동요를 느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들의 마음을 끄는 이 강한 힘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구태여 밝히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과거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든, 프랑스 왕가의 혈통을 받은 그곳의 수녀원 원장 때문이든, 아니면 그 형무소의 외관이나 높은 담벽, 담쟁이덩굴 때문이든, 다른 곳보다 더 흉악한 죄수들을 수감하고 있기 때문이든, 혹은 퐁트브로라는 이름 떄문이든 아무래도 좋다. 다만 나로서는 이 모든 이유 외에 또 하나의 이유를 갖고 있는 것이다.
- 장미의 기적, 장 주네, 민희식 옮김, 고려원, 1996




장님의 시야에 일순간 어른거리는 햇빛처럼 소름끼치는 이 무서운 일의 시초는 잠시 비명처럼 멈추었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형체를 찾을 수 없는 일순의 공포였다.
- 엑소시스트, W. P. 블레티, 하길종 옮김, 범우사, 1994




기나긴 열대야 뒤에 찜통 같은 새벽이 왔다.
- 황금을 안고 튀어라, 다카무라 가오루, 권일영 옮김, 노블마인, 2008
by delius | 2011/04/12 23:20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2)
소설의 첫 문단 (3)
겨울, 밀라노. 조용한 교외의 가로변에 값비싼 차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가로수 뒤편의 커다란 건물 안에서 수업 종료의 벨 소리가 희미하게 퍼져나왔다. 그리고 몇 분 후 겨울 바람을 막아내기 위해 외투 깃을 올린 어린애들이 계단을 재빨리 달려내려와 대기중인 차들 쪽으로 달려갔다. 차는 히터를 오해 전부터 틀어놓아 따뜻한 상태였다.
- 크리시1-불타는 사나이, A. J. 퀸넬, 이종인 옮김, 시공사, 1999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 총살대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얼음 구경을 나섰던 그 아득한 오후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 시잘의 마콘도는, 선사시대의 공룡알처럼 거대하고 매끈한 흰 돌들 위로 투명한 물이 세차게 흐르는 강변을 따라, 스무 채 가량의 흙담집이 늘어서 있는 작은 촌락이었다. 세상이 막 태동했을 무렵인 그때에는 이름없는 사물이 많아 그것들을 지칭하기 위해선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야만 했다. 해마다 3월이 되면 마콘도에는 누더기를 걸친 집시들이 몰려와 마을 어귀에 이동식 천막을 치고 북나팔을 요란스레 울려대며 새로 나온 발명품을 선전하곤 했다. 그들이 처음 가져온 발명품은 자석이었다. 뚱뚱하고 참새손에다 수염이 제멋대로인 집시가 스스로를 멜키아데스라고 소개하더니, 세계 8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이며 마케도니아의 연금술사들이 만들어 냈다는 자석의 위력을 가차없이 실증해 보였다. 그가 쇠막대 두 개를 끌고 이집저집을 돌아다니자 사람들이 무척이나 놀랐다. 냄비며 프라이팬, 화젓가락, 화로들이 제자리에서 마구 넘어지는데다 못이며 나사들이 빠져 나오려 아우성을 치는 통에 나무기둥이 삐걱거렸으며, 심지어는 오래전에 잃어버려 아무리 애써도 찾을 수 없었던 물건들이 나타나 멜키아데스의 요술 막대에 철커덕 달라붙어, 그 시끌벅적한 쇠붙이 행렬에 합세했던 것이다.
- 백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마르케스, 임호준 옮김, 고려원, 1996





질문, 끝없는 질문들. 그들은 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질문을 겹겹이 쌓아올리며, 모든 순간을 질문으로 뒤덮으며, 질문의 가시에 찔린 통증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차단하며 달려든다.
- 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정소연 옮김, 북스피어, 2007





로마 교황청에 한 가지 보고가 들어왔다. 포르투갈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가 나가사키(長崎)에서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배교(背敎)를 맹세했다는 것이다. 이 페레이라 신부는 일본에 체류한 지 33년이 되는데, 주교(主敎)라는 최고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사제와 신도들을 통솔해 온 성직자이다.
- 침묵, 엔도 슈사쿠, 공문혜 옮김, 홍성사, 2003





이 이야기는 아주 옛날 여러분의 할아버지가 어린아이였을 때 일어난 일이다. 이 이야기는 나니아 나라와 우리 세계 사이를 맨 처음에 어떻게 오고 가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 나니아 나라 이야기 1-마법사의 조카, C. S. 루이스, 햇살과나무꾼 옮김, 시공주니어, 2002





나는 죽음 담당이다. 죽음이 내 생업의 기반이다. 내 직업적인 명성의 기반도 죽음이다. 나는 장의사처럼 정확하고 열정적으로 죽음을 다룬다. 상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슬픈 표정으로 연민의 감정을 표현하고, 혼자 있을 때는 노련한 장인이 된다. 나는 죽음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죽음을 다루는 비결이라고 옛날부터 생각했다. 그것이 법칙이다. 죽음의 숨결이 얼굴에 닿을 만큼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게 하면 안된다.
- 시인, 마이클 코넬리, 김승욱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비 오는 날, 나는 이 집에 왔다.
- 혼자 있기 좋은 날, 아오야마 나나에, 정유리 옮김, 이레, 2007





연극이 끝나고 이윽고 박수가 터져나오기까지의 사이에 막을 내려버린 듯한 정적이 실내를 덮었다. 그 정적에 마음을 빼앗긴 체이핀은 통로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미국인에게서 자신도 모르는 새에 한눈을 팔고 말았다.
- 르윈터의 망명, 로버트 리델, 강호걸 옮김, 해문출판사, 1992





다바오 항을 떠나자마자 심한 풍랑을 만남. 나선을 그리며 회색 어둠을 한없이 추락하는 듯. 필리핀에서 탄 승객 중에 고생하는 자 다수. 선내에 토사물 내가 진동. 청소를 거드는데 한 승객이 가라안지는 않겠지 하고 묻기에 괜찮다고 대답. 사실을 배가 출렁일 때마다 마음 한구석으로 죽음을 각오. 그러나 죽는 것이 무섭다.
- 붉은 수금, 쓰하라 야스미, 권영주 옮김, 시작, 2009





눈 아래 저 멀리로는 우울한 안개에 싸인 허드슨 강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강 위로 흰 돛을 단 돛단배 한 척이 미끄러지듯 나타났고 평화로워 보이는 증기선 한 척이 천천히 상류로 올라가고 있었다.
- X의 비극, 엘러리 퀸, 서계인 옮김, 시공사, 1994





일본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우리 할아버지는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부터 대대손손 내려오던 우리 가문의 신분을 잃고 고작 밭 한 뙈기로 삶을 연명해야 했다고 한다.
-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 이만교, 문학동네, 2001





나이가 지긋한 이 두 노인은 버켓 씨의 부모님이다. 할아버지 이름이 조이고, 할머니 이름은 조세핀이다.
- 찰리와 초콜릿 공장, 로알드 달, 지혜연 옮김, 시공주니어, 2001





와인도 말을 한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길모퉁이에 앉은 점쟁이, 결혼 피로연의 불청객, 거룩한 바보에게 말을 건네보라. 그것은 말을 한다. 복화술을 한다. 와인에게는 백만 가지의 목소리가 있다. 와인은 혀를 풀어놓아 결코 말하고 싶지 않았던 비밀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비밀을 털어놓게 만든다. 와인은 외치고 고함치고 속삭이게 만든다. 위대한 것들을 말하고, 근사한 계획과 슬픈 사랑과 처절한 배신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깔깔대며 비명을 지른다. 혼자 나직이 키득댄다. 혼자마의 감상에 젖어 훌쩍거린다. 오래 전의 여름날과 까맣게 잊혀진 기억들을 펼친다. 한 병, 한 병, 다른 시간, 다른 장소의 향기를 풍긴다. 흔하기 짝이 없는 리브프라우밀히에서부터 거만한 1945년산 뵈브 클리코에 이르기까지 모든 와인은 하나의 작은 기적이다. '일상의 마법'이다. 조는 그렇게 불렀다. 보잘것없는 물질이 꿈을 빚어내는 재료로 변하는 것.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연금술.
- 블랙베리 와인, 조안 해리스, 송은경 옮김, 문학동네, 2006





바다로 이어지는 길은 하얗게 빛나고 있다.
- 검은 빛, 미우라 시온, 이영미 옮김, 은행나무, 2009





그 사내를 봤을 때 나는 파이를 다 먹고 커피를 두 잔째 마시고 있었다. 자정 화물 열차는 몇 분 전에 도착했고, 사내는 터미널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있는 레스토랑 창문 한 귀퉁이에서 눈에 손을 올리고 불빛에 껌벅거리면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자신을 보고 있은 걸 알아차리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거 여전히 거기 있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놈팡이들은 항상 나를 만만하게 봤다.
- 내 안의 살인마, 짐 톰슨, 박산호 옮김, 황금가지, 2009
by delius | 2010/12/18 12:52 | underline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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