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기리노나쓰오
2009/06/06   다마모에 | 기리노 나쓰오 [6]
2007/11/03   [밑줄] 나이 마흔이 되면 죽을 생각이다 [6]
2007/10/21   암보스 문도스 | 기리노 나쓰오 [6]
2007/06/18   [밑줄] 돌이킬 수 없는 일 [9]
2006/11/08   기리노 나츠오/사마다 마사히코 내한 소식 [4]
2006/10/31   [밑줄] 지우개로 지우지 않으면 노트는 다시 사용할 수 없다 [2]
다마모에 | 기리노 나쓰오
[책을 읽고 나서]


기리노 나츠오의 작품 중 지금까지 번역 출간된 소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는 작품이라는 설명을 듣고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 난 소감은 역시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남편과 갑자기 사별한 50대 전업주부의 이야기에 "일본판 '엄마가 뿔났다'"라는 광고문구가 기리노 나츠오 이야기속 주인공으로는 딱 떠오르지 않고 이야기 소재로도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에게 불륜 상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충격받고, 자기 먹고살기에 바뻐서 염치를 잊은 아들과 냉담과 관심을 오가는 딸, 가까우면서도 먼 것 같은 친구들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사람들과의 새로운 인연을 접하고 점점 변화해가는 도시코는 고독하다는 면에서 이전 작품의 주인공과 같고, 긴장을 잃지 않고 긴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 마지막 장이 마무리 등은 어디를 봐도 기니노 나츠오 소설답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정도인가?" 할 정도로 유산을 둘러싸고 이기적이고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아들의 모습에 충격받고(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이것이 요즘 만날 수 있는 자식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시코가 알게 되는 낯선 사람 한 명 한 명의 이야기에 감탄하고 - 제4장의 제목이 '인생극장'인데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만 따로 떼어도 소설 한 권이 나올듯 합니다. 분량은 작지만 [그로테스크] 속에서 중국인 장의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 또 소설이 점점 진행될 수록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도시코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공감이 느껴졌습니다. 주인공의 감정을 묘사한 여러 부분이 감탄스럽지만 후반부에 도시코가 남편의 불륜상대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감정을 폭발시키는 부분을 옮겨봤습니다. 소설을 읽다가 주인공과 동화되어 저도 모르게 화가나는 대목이었거든요.(물론 가장 화가 났던 것은 초반부의 아들과의 대화 부분. 저도 아들인데 ㅠㅠ) 바닥에 앉아 깨진 조각을 줍고 티슈로 바닥을 닦으며 자신이나 남편의 불륜 애인 모두 이긴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다시 맥이 탁 풀어졌습니다.


... 뒤로 갈수록 도시코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부당하다는 생각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이렇게 참고 있는데 왜 알아주지 않는 것인가. 그렇게나 다카유키와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자랑하고 싶은 것인가. 순간 도시코는 테이블 가운데에 있던 작은 질그릇 꽃병을 집어서 안에 든 도라지꽃째 바닥에 내던졌다. 반들반들한 나무 바닥에 도자기 파편과 물과 꽃이 튄 것을 보고 도시코는 후회했다. 이 광경은 자신의 망막에 새겨져 평생 사라지지 않으리라.
  "미안합니다. 변상하겠습니다."
  도시코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후회가 되어 힘이 쭉 빠졌다. ...



기리노 나츠오 팬들이라면 당연히 좋아하실 것 같고 ^^ 처음 기리노 나츠오 소설을 접하시는 분들이라면 다른 작품보다는 좀더 편안하게 이 작가를 만나게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했습니다. 번역본의 출간보다 영화개봉이 빨랐는데 소설을 읽고 봐야지 하다가 놓혔습니다. 영화도 꼭 챙겨보렵니다.


[서지정보]


제목 : 다마모에
원제 : 魂萌え! (2005)
지은이 : 기리노 나쓰오 저 [桐野夏生]
옮긴이 : 김수현
출판사 : 황금가지
발간일 : 2008년 12월
분량 : 556쪽
값 : 13,000원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by delius | 2009/06/06 07:33 | book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밑줄] 나이 마흔이 되면 죽을 생각이다
나이 마흔이 되면 죽을 생각이다. 이제 서른여덟하고도 두 달을 살았으니 이태도 남지 않았다. 방금 틀 안에 부은 콘크리트가 점점 굳어 가듯 내 결심도 하루하루 물기와 거품이 빠지며 굳어 가고 있다. 죽기로 작정을 한 뒤 마음이 편안해졌다. 전보다 더 밝고, 그리고 꿋꿋하다. 무슨 일이든 긍정적이다. 하지만 내겐 인생을 즐겁게 살기 위한 목적 따윈 전혀 없다. 필요도 없다. ...


... 어떤 기억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증식한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세부적인 내용은 윤곽이 흐려지고 애매해진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 그 명암이 점점 뚜렷해진다. 나는 희미해진 세부를 되살리려는 게 아니다. 증식하는 기억에 더욱 힘을 보태 해방시키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죽이러 간다.



[다크], 기리노 나쓰오, 권일영 옮김, 비채, 2007




[다크]의 1장의 시작 부분과 끝부분. 1장의 제목도 "나이 마흔이 되면 죽을 생각이다".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가면서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에 가슴을 졸이고 곳곳에 숨겨져 있는 뜻밖의 전개와 선택에 놀라다 보니 결말에 이르렀네요. 책을 읽고 있는 중에 [판타스틱] 11월호에 실린 번역자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경우는 독자가 금세 읽듯이 작업할 때도 빠르죠. 하지만 기리노 나츠오 같은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 [다크] 1장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 1장은 완벽하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문장을 옮기기는 힘듭니다. 해석은 되는데 우리말로 어떻게 옮겨야 이 상황에 더 근접할까 이런 문제로 오래 고민했습니다. ..." 적극 공감입니다. 특히 1장은 정말 대단대단... 다른 기리노 나츠오 작품이 마음에 드셨다면 당연히 이 작품도 마음에 드실 것 같네요. 적극 추천합니다.




p.s. 번역본 표지와 원서표지
by delius | 2007/11/03 22:55 | underline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암보스 문도스 | 기리노 나쓰오
[책을 읽고 나서]


표제작 "암보스 문도스"를 포함해서 7편의 단편이 묶여 있는 단편집인데 추천사로 언급된 가쿠다 미쓰요의 말처럼 "모든 작품들이 무서울 정도로 확실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어서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기리노 나쓰오 소설을 처음 읽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출간된 것은 다 장편이었기에 단편은 어떠려나? 하는 호기심에서 하나 하나 읽어 나갔는데 결론에 이르러서는 헉... 저런.... 악... 하면서 한 편 한 편을 읽어나갔습니다. 개인적으로 "괴물들의 야회"와 "독동"(毒童) 읽으면서 마지막 부분 처리에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기리노 나쓰오 소설 읽으면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어쩜 이런 결론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는 것인지 소름이 끼치더군요. 특히 "괴물들의 야회"의 경우 마지막장을 넘기자 마자 바로 전개되는 마지막 결말에 충격받았습니다. 덜덜덜... 무척 낯익은 설정임에도 새롭게 느껴지는 "식림"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 같다가도 어찌보면 현실적으로 보이는 "부도의 숲"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역시 표제작인 "암보스 문도스"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는 긴 독백체의 단편소설에 매력을 느끼는 편인데 이 작품 역시 그런 형식을 띄고 있었고, 이야기 전개나 결말 역시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호불호가 갈릴만한 단편도 있지만 기리노 나쓰오 팬이라면 당연 좋아하실만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서지정보]


제목 : 암보스 문도스
원제 : アンボス・ムンドス (2005)
지은이 : 기리노 나쓰오 [桐野夏生]
옮긴이 : 김수현
출판사 : 황금가지
발간일 : 2007년 05월
분량 : 262쪽
값 : 8,500원




p.s. 오랜만에 황금가지 책에서 오타 발견~ 여전하시군요~ :-) / 가쿠다 미쓰요를 [납치여행]의 작가라고 소개했는데, [납치여행]이 대표작도 아니고, 황금가지에서 나온 것도 아닌데 좀 이상하더군요. [대안의 그녀]나 [공중정원]의 작가라고 소개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아요~


p.s. 국내판표지와 원서표지. 국내판표지가 더 좋아요~
p.s. 쿠바에는 정말 암보스 문도스라는 호텔이 있네요~ Hotel Ambos Mundos
by delius | 2007/10/21 22:46 | book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밑줄] 돌이킬 수 없는 일
... 거짓말을 하는 엄마와 신경 쓰지 않는 척하는 나. 내가 유치한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엄마와 나의 인간관계가 뿌리 끝에서부터 무너져 가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엄마를 신뢰할 수 없지만, 신뢰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떄문에 신뢰라는 것 자체를 다듬어 고쳐야만 한다.
  나는 아빠를 멀리하게 되었다. 엄마에 대한 억제된 증오가 아빠를 향해 분출된 것이다. 사실은 밉지만, 직접적으로 엄마에게 터뜨릴 수 없는 것은 내가 아직 엄마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는 아빠대로, 아마도 같은 이유로 엄마에 대한 증오를 우리들에게 향했다. 뒤틀린 증오가 오가며, 나는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나는 엄마에 대한 불신을 어떻게든 감추어 엄마를 믿고 사랑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파탄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내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부모의 학대라는 것은 분명 이러한 구조일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를 믿지 못하게 되어도 받아들이게 되는 아이는 언젠가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된다.
  봐라, 미미즈.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엄마를 죽이는 일 따위가 아니야.



[리얼월드] 중에서, 기리노 나쓰오, 윤혜원 옮김, 마야, 2007




책 뒷편에 써있는 문구. "고3 여름방학, 호리닌나라고 불리는 야마나카 도시코의 옆집 소년이 엄마를 살해하고 도주하다!" 소설은 이 야마나카 도시코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친구 3명과 옆집 소년(미미즈)의 각각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마지막은 다시 도시코의 시선에서 끝납니다. 처음 시작은 정말 기리노 나츠오 소설 답지 않게 가벼운 느낌이 들어서 "아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라서 이전과는 좀 다른 느낌이네~"하고 주인공 도시코의 말에 키득키득 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는 미미즈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에 가서는 "아... 당신은 역시 변함이 없군요 Orz"하고 긴장하며 읽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미미즈의 심리 묘사와 범행장면 묘사는 [아웃]의 그것(그거 있잖아요.. ㅡ.ㅡ)을 훨씬 뛰어 넘는다는 생각인데 다시 그 부분을 펼쳐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입니다.(정확하게 같은 느낌은 아니겠지만 제가 [천상의 피조물]을 자막도 없이 NHK에서 방송해준 것을 말귀하나 못알아 듣고 본 것이 꽤 오래전인데도 그 후반부 장면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것과 비슷해요.) 


이전 작품 [아웃]이나 [그로테스크]를 읽은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이 작품도 여자 4명과 남자 1명이라는 주인공 구도를 가지고 흘러가는데 평론가는 "아마도 동성 4인조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필요한 최소 단위"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분석을 포함해서 해설은 기리노 나츠오 소설을 관계 문학이라고 정의하고 소설의 특징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냥 막연하게 "기리노 나츠오 소설 = 구원없음" 정도로만 보고 있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소설을 보는 눈이 뜨인 기분이더라구요. 아래 그 부분을 잠깐 옮겨봅니다.


... 기리노 씨는 아무래도 처음에 치밀한 플롯을 세우고, 거기에 살을 붙여 나가는 소설을 쓰는 타입의 작가는 아니다. 캐릭터를 조작하는 사이에 처음에는 예상도 하지 못했던 관계성이 보여,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기리노 씨는 그 과정을 교묘하게 작품에 도입한다. 이것은 자주 언급되는 '캐릭터의 혼자 걷기'라는 사태에 가깝다. 단, 기리노 씨의 경우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은 인물만이 아니라고 한정할 수 없다. 마치 관계 그 자체가 자율성을 획득해 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


기리노 나츠오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에게는 (늘상 하는 이야기지만) 적극 추천합니다. 단 존속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이런 쪽의 내용을 피하시는 분이라면 피하시면 좋겠습니다.


 

p.s. 갑작스레 황금가지에서 기리노 나츠오 작품을 쏟아 내기 시작해서 다른 출판사에도 작품이 나오는지 미쳐 몰랐습니다. 판권란을 확인하니 2007년 4월 출간. 생각난 김에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 보니 [그로테스크] 이후 다음과 같은 순으로 출간되었네요. [아임 소리 마마](황금가지) - [리얼월드](마야) - [아웃](재출간, 황금가지) - [잔학기](황금가지) - [암보스 문도스](황금가지) - [다크](비채) 순. 2007년 상반기 동안 무려 5권이라니 일본소설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p.s. 원서표지와 국내판 표지. 원서표지가 더 좋아요.
by delius | 2007/06/18 00:24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9)
기리노 나츠오/사마다 마사히코 내한 소식
기리노 나츠오님이 한국에..
여사님!!!


물론 기리노 나츠오외에 사마다 마사히코도 오지만 제게는 단지 기리노 나츠오만 눈에 띄는 군요 ^^ 위 블로그에 올라온 내용을 한글로 바꾸고 조금 편집했습니다~ 일반인 참석도 가능하다니 시간 되시는 분은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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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21 중일 언어 · 문화 교육단 한일 현대작가 심포지엄 - 문학의 새 지평 : 기억 · 경계 · 미디어]


한일 현대작가 심포지엄


- 사회 : 최관(고려대 일문과 교수)


○ 개회 : 14:00~14:10


- 개회식
- 인사 : 김춘미(고려대 일본학연구센터 소장)


○ 개인발표 : 14:10~16:10


- 시마다 마사히코 / 기리노 나츠오 / 신경숙 / 구효서


○ 휴식 Coffee Break : 16:10~16:20


○ 한일 현대작가 대담 및 종합 토론 : 16:20~18:00


- 사회 : 김춘미(고려대 일문과 교수) / 우찬제(서강대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 일 시 : 2006년 11월 10일(금) 14:00~18:00
- 장 소 : 고려대학교 백주년기념관 국제원격회의실

- 주 관 : BK21 고려대학교 중일 언어 · 문화 교육단
- 주 최 : 일본학연구센터 / 일본공보문화원후 원 : 일한문화교류재단 / 고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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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반차를 낼까 말까 망설이고 있습니다. (   ' ' )
by delius | 2006/11/08 14:08 | talk | 트랙백 | 덧글(4)
[밑줄] 지우개로 지우지 않으면 노트는 다시 사용할 수 없다
... 내버려두면 좋겠어. 아이코의 뇌는 바로 앞의 일밖에 생각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위험을 피해야 한다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지우개로 지우지 않으면 노트는 다시 사용할 수 없다. 새 노트를 사주지 않아서 아이코는 몇 번씩 지우개를 사용했다. 잘 지우지 않으면 노트는 더러워져서 마침내 찢어진다. 그렇게 하는 동안 어차피 지울거면 처음부터 쓰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어서 수업 중에도 노트 필기를 하지 않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아이코는 지식이나 경험을 축적하여 사고하는 습관을 아주 깨끗이 잊어버렸다. 녹초가 될 정도로 더운 한여름에는 옷을 입으면 땀만 흐른다며 빨래하는 걸 귀찮아하던 창녀 언니들은 슬립 한 장만 걸쳤다. 그것과 똑같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과거의 연줄을 이용하고, 이용할 가치가 없어지면 지워버린다. 그렇게 하면 아주 깨끗한 노트로 살 수 있으니까 자신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어쨌든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그러니까 과거의 인간관계를 이용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결국 타인이기 때문에 어떤 번거로운 일이 생기거나 귀찮아지면 그만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해버리기 때문에 처리해야만 한다. 그래, 그래, 그런거야 하고 아이코는 간단하게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이 아이코가 살면서 깨달은 지혜였다.


이럴 때 문득 생각하게 되는 건 상대가 타인이 아니라 피가 섞인 가족이라면 어떨까 하는 가정이었다. 어린 시절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이 하늘 아래 어딘가에는 자신이 진짜 집이 있고, 그곳에서 아빠와 엄마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 적도 있었다.


만약 새 노트가 많이 있어서 지우개로 지우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자신이 쓴 것과 공부한 것이 쌓이고 쌓여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왠지 그런 일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자신에게 아빠와 엄마라는 사람이 있어도 이용하고 귀찮아지면 부정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



[아임 소리 마마], 기리노 나쓰오, 이은주 옮김, 황금가지, 2006





어쩌면 이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우리에게 들이미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도 주인공에게 구원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네요. ㅜㅜ 기리노 나츠오 팬이라면 좋아할만한 작품이지만 분량이 국내 출간된 다른 작품에 비해 반밖에 되지 않아 조금 아쉽다는 생각도 듭니다. 기존 밀리언셀러클럽 소설을 생각하시고 책을 고르신다면 이 책이 추리소설에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요소를 많이 홀대하고 있다는 점을 참고해주세요. ^^




p.s. [아미 소리 마마] 일본 공식 사이트 : http://www.shueisha.co.jp/kirino/. 옮긴이이의 말에 언급된 사마토 다마키와의 인터뷰 전문이 실려 있다. 이정도 정보는 책에서 줄 수 있을법 한데 배려가 아쉽다.


p.s. 원서표지
by delius | 2006/10/31 19:08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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