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권일영
2010/10/25   [밑줄] 존재한다는 것은 [2]
2010/05/19   [밑줄] 눈동자가 흔들렸다고 해서 [2]
2009/06/27   [밑줄] 그래서 야쿠자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거야 [3]
2008/10/14   [밑줄] 나한테 딱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니? [6]
2008/06/14   [밑줄] 그러면 무엇이 지도가 할 일인가 [6]
2007/11/03   [밑줄] 나이 마흔이 되면 죽을 생각이다 [6]
[밑줄] 존재한다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존재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래서 무의식의 둔감함보다 의도된 악의 쪽이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몰라.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은 아직 아린애라고 할 수 있어."


[나전미궁]중에서, 가이도 다케루, 권일영 옮김, 예담, 2010




마지막으로 읽었던 [제너럴 루주의 개선]의 기억이 가물가물했던터라 시라토리와 히메미야 콤비에 적응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역시 이런 시리즈는 몰아서 읽는 것이 좋은 듯 ^^ 이전 까지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하고 그것을 유머와 개성넘치는 캐릭터를 통해서 잘 전달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무래도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만큼의 지지를 받지는 못하겠지만 이어지는 시리즈가 나온다면 또 읽게 될 것 같습니다. :-)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첫번째 원서표지는 나전이 나전칠기의 그 나전(螺鈿)이라는 것을 보여주네요~
by delius | 2010/10/25 13:05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2)
[밑줄] 눈동자가 흔들렸다고 해서
... 처음 사복형사가 되었을 무렵, 치카코는 경찰서 내에서 취조의 달인이라 불리던 선배와 한 해가량 책상을 마주하고 지낸 적이 있다. 자백을 받아내는 데는 최고라 할 만한 그런 취조의 달인은 어느 경찰서에나 한두 명은 있기 마련인데, 대개는 산전수전 다 겪어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선배 남자 형사들이다. 그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생한 사람답게 처지가 곤란한 사람에게 자상했다. 여형사는 미숙하고 수사에 큰 도움이 안된다는 풍조가 지배적이던 당시의 형사실 안에서 가급적이면 치카코를 편들고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그 달인이 가르쳐준 것 가운데 치카코가 제대로 익힌 게 딱 하나 있었다.
  취조실에서 상대하는 피의자의 눈이 불안하게 허공을 더듬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자기 이야기의 모순을 지적당해서 당황했거나, 거짓말을 거짓말로 덮으려다 당황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의 움직임이 불안해지고 초점을 잃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아주 순간적이고, 본인도 그걸 의식 못하는 경우가 많다.
  - 그럴 때는 말이야, 이시즈 씨.
  달인이 말했다.
  -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머릿속에 봉인해둔 기억이 불쑥 되살아나는 거지. 그것도 엄청 선명하게, 그쪽에 신경을 쓰다보니 눈동자가 허공을 더듬는 거야. 대충 진술하거나, 거짓말을 할 때의 눈동자 움직임하고는 전혀 달라. 그걸 제대로 구분하느냐 못하느냐가 중요해.
  그렇게 불쑥 되살아나 주의력을 빼앗는 것은 어떤 피의자에겐 범행에 관한 상세한 재현 기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피해자에겐 자기를 지독하게 학대한 새아버지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다.
  - 눈동자가 흔들렸다고 해서 반드시 그 녀석이 범인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다는 이야기야. 조사 대상이 된 사건과 눈동자를 흔들리게 한 기억이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해를 깊게 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돼. 그러니까, 마주 앉은 피의자의 눈동자가 마치 안으로 숨어 들어가듯 허공을 더듬으며 초점을 잃게 되면,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잘 기억해둬야 해.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르니까.
  치카코는 지금도 그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취조의 달인이 된 건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



[크로스 파이어] 1권 중에서, 미야베 미유키, 권일영 옮김, 2009, 랜덤하우스코리아




요즘 EBS에서 하고 있는 [다큐프라임] "말하기의 다른방법"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의식하지 않은 몸짓이었는데, 어제 방영된 "몸짓의 기억"에서도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부산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조용하다고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제공하는 정보를 최소화 한다는 것이지요. "말하기의 다른방법" 시리즈가 하는 중에 [크로스 파이어]를 읽다 보니 이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와서 밑줄을 그어봤습니다.
소설은, 미야베 미유키 소설이 늘 그렇듯 재미있지만 슬프고, 읽고 난 뒤에 여러가지 생각할 꺼리를 던져줍니다. 마무리장면을 보며 "준코가 너무 불쌍하잖아."하며 주인공을 안타까워 하다가 "그래.. 그렇게 끝나는 것이 맞겠군." 하면서 결말부분을 긍정하기도 하고... 왔다갔다 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의 고독과 갈등을 영화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한데, 예전 메가박스 일본영화제때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크로스 파이어]를 매진으로 못본 것이 무척 아쉽네요. 미야베 미유키 팬이라면 적극추천하고 싶습니다. 초능력자가 주인공인 다른 작품 [용은 잠들다]와 비교될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크로스 파이어]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




p.s. [크로스 파이어]에는 잠깐 언급되는 사건의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외전격인 단편 "번제"가 실린 [구적초](북스피어)를 먼저 읽어서 소설에 좀 더 쉽게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해당 내용은 책 말미 역자 후기에도 언급됩니다.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번역본 표지의 일러스트가 맘에 쏙 듭니다.

by delius | 2010/05/19 23:38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2)
[밑줄] 그래서 야쿠자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거야
... 하시즈메는 바로 칼날을 뽑아 내 턱 아래 들이댔다. 살짝 통증이 왔다.
  "다시는 그따위 짓 하지 마." 하시즈메가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내가 왜 널 죽이지 않는지 알아? 야쿠자가 누군가를 죽일 때는 자신보다 상대가 잃는 것이 많다는 손익계산이 있기 때문이야. 세상 사람들이 야쿠자를 두려워하는 것도 그 손익계산이 되기 때문이지. 야쿠자와 서로 죽인다 해도 상대편아 훨씬 손해거든. 슬퍼할 부모가 있고, 보복을 두려워할 마누라가 있고, 길거리를 헤맬 자식이 있고, 멍청한 짓을 했다고 꾸짖을 친구가 있어. 그래서 야쿠자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거야. 하지만 넌 어때? 지금 널 죽여봤자 내가 너보다 잃을 게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시즈메의 눈에 내가 그렇게 보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시즈메는 칼날을 접어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실크 넥타이를 고쳐 매고 올백으로 넘긴 머리를 쓰다듬더니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냉정해졌다. ...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중에서, 하라 료, 권일영 옮김, 비채, 2008




[내가 죽인 소녀]로 나오키 상을 수상한 작가 하라 료의 작품 중 국내 번역된 유일한 작품입니다.(예전에 [내가 죽인 소녀]가 번역되었지만 절판되어 구할 수 없어요 ㅠㅠ) 작가소개를 보면 원래 과작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출간한 장편소설이 4편뿐이라고 하니 국내출간작품이 1권이라도 그렇게 적다는 생각이 안드네요. 위의 밑줄은 주인공 사와자키 탐정과 야쿠자가 만나는 장면인데 사와자키에 대한 느낌과 그의 유머감각 - "하시즈메의 눈에 내가 그렇게 보였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본인은 이야기 하지만 실제 독자인 저는 야쿠자의 말에 동감했거든요 ^^ - 이 잘 드러나 있는 것 같아서 골라봤습니다. "헝크러진 사건들이 하나로 이어질 때, 밤의 도시는 긴 어둠에서 깨어난다"는 뒷표지의 말처럼 여러가지 관련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사와자키의 수사를 통해서 하나로 연결되는데, 이렇게 배후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미스테리적인 면도 소홀하지 않아서 하라 료 = 하드보일드라만 생각하고 봤다가 덤으로 재미를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앞에 이야기한 [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 만큼이나 등장인물이 많아서 - 맨앞의 등장인물을 세보니 27명 - 이름때문에 많이 힘들겠구나.. 했는데 의외로 큰 어려움 없이 잘 적응하며 읽었습니다.(하지만 후반부에 나오키와 나오코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사람 대사에서 나올 때는 조금 헷갈렸어요. 흑흑)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작품이라서 적극 권하고 싶습니다.




p.s. 옮긴이의 말에 보면 비채에서 하라 료의 소설을 모두 소개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만세~ 2번째 작품은 [내가 죽인 소녀]~


p.s. 번역본과 원서 표지. 원서 표지도 멋지지만 번역본 표지 정말 멋져요~
by delius | 2009/06/27 09:09 | underline | 트랙백 | 핑백(1) | 덧글(3)
[밑줄] 나한테 딱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니?
  "네코타 선배, 정말로 총간호사장이 되려고 생각하신 거예요?"
  하나부사가 물었다. 네코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내가 총간호사장이 되려는 게 이상한가?"
  "그렇지는 않지만, 왠지 그런 자리와는 인연이 먼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째서? 나 말고 할 만한 사람이 없잖아. 도조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간호과의 간호사 200명을 이끌 수 있는 인재는."
  네코타가 슬쩍 웃었다. 그러더니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너한테만은 진심을 얘기해 줄게. 총간호사장이란 자리, 편할 것 같지 않아? 다른 사람들한테 지시만 내리면 되니까. 나한테 딱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니?"
  하나부사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은 늘 이런 식이다.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다.



[제너럴 루주의 개선]중에서, 가이도 다케루, 권일영 옮김, 예담, 2008




시리즈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다구치와 시라토리도 있고, 이전 [나이팅게일의 침묵]의 사요나 쇼쿄, 또 이번 작품의 제목에도 나오는 제너럴 루주 하야미 부장도 있지만 지금까지 읽어본 3편 소설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은 고양이처럼 졸면서 무심한듯 해야할 일들을 잘 처리하는 네코타 간호사장이었습니다. 나오는 장면이 많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였는데 후반부에 가서 이렇게 살짝 속내를 드러내는 부분이 나와서 기뻤습니다. 그래서 [제너럴 루주의 개선]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큰 관련도 없는 이 부분에 밑줄을 그어봤어요. :-)


앞으로 4번째 책이 국내 발간 예정이라는 가이도 다케루의 작품은 발간 순서에 따라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을 처음 읽었습니다. 시리즈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다구치와 시라토리가 처음 등장한 이 작품은 각종 미스터리 작품순위에 올라가는 것이 당연할 만큼 흥미진진한 작품이었습니다. 잠깐 등장하는 조연도 기억에 날만큼 살아움직이는 캐릭터와 적절한 유머에 미스터리 요소, 거기에 대학병원에 생생한 묘소까지 잘 배합된 종합선물세트처럼 느껴져서 다음 작품을 기대하면서 읽었습니다. 2번째로 읽었던 [나이팅게일의 침묵]은 기대가 컸던 탓일까? 아니면 좀 미스터리 부분이 약했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첫번째 작품보다 재미있다는 말을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같은 시간대에 일어나는 이야기인 [제너럴 루주의 개선]을 읽기 전까지는 "흠... 재미있기는 한데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걸 잘 모르겠어요."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답니다. 그러다 좀 지나서 [제너럴 루주의 개선]의 읽게 되었는데 마차 상/하로 나눠 출간된 작품을 상만 읽었다는 느낌이 들 정로도 두 작품은 모두 읽어야 재미를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제너럴 루주의 개선]을 읽고나서 느낀 것인데 이 두 작품은 꼭 함께 읽어야 하고, 미스터리라기 보다는 아주 재미있는 소설(옮긴이의 말에 나온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이거다, 저거다 구분하지 말고 그냥 엔터테인먼트 소설로 즐기는 것이 가장 낫다")로 접근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이 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다구치와 최근에 책에서 만난 가장 짜증나게하는 캐릭터인 누마다 에식스 커미티 위원장의 대립을 그린 장면들인데 - 회사에 다니다 보면 누마다 같은 사람들을 꼭 만나게 되요~ ㅡ_ㅡ - 둘의 만남부터 이어지는 대립, 그리고 마지막 회의석상의 감정 폭발과 반전 등은 미스터리 소설이 주는 재미와는 다른 차원의 통쾌함과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수수께끼를 풀어서 진범을 밝히는 미스터리를 기대하셨다면 실망하시겠지만, 400페이지 남짓한 책을 한 번에 읽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을 느낄 만한 작품은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_^)/




p.s. 네코타 간호사장 다음으로 맘에 드는 사람은 후지와라 간호사랑 다카시나 병원장이에요 ^.^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원서표지는 [나이팅게일의 침묵]과 한 쌍을 이루네요~



by delius | 2008/10/14 23:59 | underline | 트랙백 | 핑백(2) | 덧글(6)
[밑줄] 그러면 무엇이 지도가 할 일인가
  ... 그러면 무엇이 지도가 할 일인가. '차폐'(遮蔽)와 '과장'(誇張) 이 두 가지 단어면 충분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저 혼자의 의견이 아니라 면면히 이어져온 지도의 역사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지구상에서 지도를 사용하는 사람은 주로 도련님이나 그 부친 같은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 예를 들면 새나 벌, 또는 어떤 보행성 동물들처럼 환경을 늘 입체나 공간으로 파악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이런 것을 유클리드적 인지라느니 하는 거창한 말로 바꿔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요). 결국 인간의 경우에는 자기 주위의 환경을 그 '공간'에 대한 이미지를 통해 파악한다는, 이른바 현실의 풍경 이외에도 '마음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서도 저마다 '지도'는 묘하게 다릅니다. 예를 들어 A에서 B까지 이동할 때 최단 루트를 선택한다 해도 각자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애써 의도하지 않은 경우에는 반드시 '최근접의 원칙'이 타당하다는 것이 예로부터 우리 지도에게는 불변의 진리였습니다. 간단하게 설명 드린다면 인간이 무슨 일을 할 때 여러 개의 선택 항목이 제시되면 반드시 가장 힘들지 않은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있는데도, 그리고 물리적으로는 최단 루트는 하나일 수밖에 없는데도 실제 선택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차이가 생기는 것은 이 '마음의 지도'가 만들어내는 편차가 원인입니다.
  편차는 '마음의 지도'란 이미지를 이루는 구성요소에 의해 발생합니다. 가령 출발 지점과 목적 지점에 대한 매력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지점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이 몇 개이며 어떤 형식인가, 루트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선택하는 루트가 매력이 있는가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즉 A에서 B까지 가는 루트를 결정할 때, 물리적인 거리 이외에 익숙한 길이 있는가,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는가, 좋은 느낌을 주는 지점이 있는가 등이 최단거리 우선으로 선택한다 해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중에서, 히라야마 유메아키, 권일영 옮김, 이미지박스, 2008




2007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를 차지한 단편집입니다. 위에 좀 길게 옮겨 적은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은 표제작이면서 2006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은 작품이라서, 다른 작품에 비해 두드러지는 면이 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나는 지갑이다]처럼 지도책이 화자가 되서 이야기를 하는 작품으로 읽는 재미와 결말 처리가 모두 맘에 드는 단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추리작가협회상이라니~ 재미있는 미스터리 단편이겠군! 하시는 분들에게는 "잠깐만!"을 외치고 싶을 정도로 기대와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는 점도 말씀드리고 싶네요. 모두 8편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 잔인한 묘사에 식인과 고문이 이어지는 단편들이라(가끔 유머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만 ^^) "미스터리"에 방점을 찍고 책을 볼까 망설이신 분들은 말리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읽으면서 딱 영화가 상상되는 작품도 여럿 있어 흥미를 끌었는데, 예를 들어 첫번째 수록작인 "에그 맨"은 [양들의 침묵]을, "오퍼런트의 초상"은 [이퀼리브리엄]을, "끔찍한 열대"는 [지옥의 묵시록]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다른 단편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니코친과 소년"을 제외한 나머지 "Ω의 성찬"이나 "소녀의 기도", "괴물 같은 얼굴을 한 여자와 녹은 시계 같은 머리의 남자"는 소설로 읽은 잔인함에 있어서는 하나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클라이브 바커식의 피가 흐르는 듯한 단편과는 또 다른 의미의 잔인함이라는 생각인데 그렇다고 호러로 느껴지지도 않고 뭐라 딱 꼬집어 이야기 하기가 어렵지만, 끈적하게 불쾌한 느낌과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결말을 주는 점에서는 묘한 매력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로 치면 별 다섯이랑 별 한개가 극명하게 갈라지는 식인데, 기괴하고 끔찍한 소설에 흥미를 느끼시는 분에게는 더할나위없는 최고의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p.s. 역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를 차지한 작품 중 국내 출간된 작품의 면면과 비교해보면 이 작품이 1위라는 점에 고개가 좀 갸우뚱 해지는데 2006년 1위가 [용의자 X의 헌신](히가시노 게이고), 2003년 1위는 [사라진 이틀](요코야마 히데오), 2002년 1위 [모방범](미야베 미유키), 1998년 1위 [OUT](기리노 나츠오)과 이 작품을 비교하면 어째서 이 작품이? 하는 의문이 더 깊어집니다. 옮긴이의 말에도 "왜 일본추리작가협회와 각종 소설 순위 결정 투표자들이 이 소설에 표를 던졌는지도 한 번쯤 생각해주시기를 바랍니다."로 맺고 있는데, 제게는 이런 류의 소설에서 상상할 수 있는 한계까지 독자들을 몰아 붙인 점에 한 표를 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고로 원서를 펴낸 光文社에서는 "この作品から日本が壊れていく!"라는 문구를 홍보 패널에 사용하고 있네요. ^^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둘 다 나름 장점이 있지만 기괴한 소설이라는 점에서는 원서표지가 더 잘 어울리는 듯 합니다.
by delius | 2008/06/14 11:06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6)
[밑줄] 나이 마흔이 되면 죽을 생각이다
나이 마흔이 되면 죽을 생각이다. 이제 서른여덟하고도 두 달을 살았으니 이태도 남지 않았다. 방금 틀 안에 부은 콘크리트가 점점 굳어 가듯 내 결심도 하루하루 물기와 거품이 빠지며 굳어 가고 있다. 죽기로 작정을 한 뒤 마음이 편안해졌다. 전보다 더 밝고, 그리고 꿋꿋하다. 무슨 일이든 긍정적이다. 하지만 내겐 인생을 즐겁게 살기 위한 목적 따윈 전혀 없다. 필요도 없다. ...


... 어떤 기억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증식한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세부적인 내용은 윤곽이 흐려지고 애매해진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 그 명암이 점점 뚜렷해진다. 나는 희미해진 세부를 되살리려는 게 아니다. 증식하는 기억에 더욱 힘을 보태 해방시키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죽이러 간다.



[다크], 기리노 나쓰오, 권일영 옮김, 비채, 2007




[다크]의 1장의 시작 부분과 끝부분. 1장의 제목도 "나이 마흔이 되면 죽을 생각이다".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가면서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에 가슴을 졸이고 곳곳에 숨겨져 있는 뜻밖의 전개와 선택에 놀라다 보니 결말에 이르렀네요. 책을 읽고 있는 중에 [판타스틱] 11월호에 실린 번역자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경우는 독자가 금세 읽듯이 작업할 때도 빠르죠. 하지만 기리노 나츠오 같은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 [다크] 1장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 1장은 완벽하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문장을 옮기기는 힘듭니다. 해석은 되는데 우리말로 어떻게 옮겨야 이 상황에 더 근접할까 이런 문제로 오래 고민했습니다. ..." 적극 공감입니다. 특히 1장은 정말 대단대단... 다른 기리노 나츠오 작품이 마음에 드셨다면 당연히 이 작품도 마음에 드실 것 같네요. 적극 추천합니다.




p.s. 번역본 표지와 원서표지
by delius | 2007/11/03 22:55 | underline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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