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첫 문단 (14)
9월말의 그 밤, 산장 2층 정면 침실에 있는 창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찡할 정도의 가정적인 분위기가 눈에 비칠 것이다. 난로에서 훨훨 타는 장작의 희미한 빛에 네 기둥이 달린 구식의 큰 침대에 누워 있는 필립 웨더비와, 그 옆의 작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그 아내의 모습이 보였을 게 틀림없다. 차근차근히 살펴보면 볼이 붉게 물들어 있고 숨이 가쁜 것으로 미루어보아 필립이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거야 그렇다 치고, 들여다보는 사람이 남자였다면 조금은 선망의 마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여자의 근심스러운 듯한 눈, 가끔씩 남편의 이마에 땀에 젖어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려주는 다정한 손길, 그리고, "주무세요, 필, 주무세요."라고 중얼대는,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온는 노래 부르는 듯한 태도가 부러워지는 것이다.
- 탐정을 찾아라, 패트리셔 매거, 김석환 옮김, 해문출판사, 1990




황 승각 노인은 대문을 활짝 열어 새벽을 맞았다. 해는 아직 오르지 않았고 희끄무레 벗겨지는 동녘 하늘에서는 늦별들이 머뭇거렸다. 들판에 두어 채씩 흩어진 초가 토담집에서는 낮은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라 안개처럼 처마에 걸려서 날마다 보아도 똑같은 아침 풍경이었지만 오늘만은 다른 데가 있었다. 강 건나 읍내 쪽으로 눈을 돌리면 시꺼먼 연기가 아직도 꾸역꾸역 봉의산보다도 높이 솟았다. 어제 낮부터 시작된 공습이 밤새도록 계속되더니 춘천 철도역 부근에서는 날이 밝아도 집들이 그냥 불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 은마는 오지 않는다, 안정효, 고려원, 1990




참된 로리타는 로코코적인 정신으로 무장하고 로코코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 시모츠마 이야기-양키 소녀와 로리타 소녀, 다케모토 노바라, 기린 옮김, 두드림, 2005




로즈메리와 거이 우드하우스가 1번가에 있는 기하학적인 흰색 아파트에 방 다섯 개짜리 거처를 세내는 계약을 막 끝내고 돌아왔을 때에 코데트 부인이라는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 부인은 브램퍼드에 방 네 개짜리 아파트가 비어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브램퍼드는 고풍스럽고 검은색을 띤 거대한 건물로서 방 천정이 높고, 벽난로와 빅토리아 왕조풍의 세공으로 알려진 아파트이다. 로즈메리와 거이는 결혼 이래 지금껏 그 아파트에 방이 나기를 기다려 미리 신청을 해두었던 터지만, 기다리기에 지쳐 마침내 단념을 했었다.
- 로즈메리의 아기, 아이라 레빈, 최운권 옮김, 해문출판사, 2001




양쪽에서 드리워진 함석지붕 차양이 하늘을 가진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걷고 있던 서방은, 차양 틈새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햇빛이 한 아름 수직으로 내리쬐고 있다.
- "그늘의 집", 현월, 신은주·홍순애 옮김, 문학동네, 2000




봄가뭄이 심하긴 심한가 보다. 털털거리며 비포장도로를 달려 온 버스는 다시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꽁무니를 감추고 터나갔다. 전국 도로 포장율이 61.4퍼센트라면서 서울에서 시외버스로 두 시간 반이면 닿는 이곳은 아직도 흙자갈길이다. 서울에서 천안까지는 고속도로로, 온양을 지나 예산읍까지는 매끄럽게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예산읍내서 출발하는 직행버스를 타고 첫번째로 정차하는 신양면까지 포장이 돼 있는데 신양면을 지나면서부터 송전면(松田面)까지는 비포장도로라서 20여 분을 털털거리며 와야 했다. 바로 이웃해 있지만 산양면의 관할군청은 예산군이고 송전면은 청양군에 속해 있어 도로 포장이 보릿고개 됫박 인심처럼 뚝 잘라진 것일 게다.
- 저린 손끝, 권경희, 고려원, 1996




리델 하트가 쓴 [유럽 전쟁사] 242페이지를 보면 1916년 7월 24일 영국군 13개 사단이 (1,400문의 대포 지원하에) 세르-몽또반 전선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29일 아침까지 연기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적혀 있다. 리델 하트 대위는 공격 연기가 폭우 때문이었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적고 있다. 칭따오 대학의 영문학 노교수였단 유춘 박사가 구슬한 뒤 직접 검토하고 서명한 아래의 진술을 그 사건의 진상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다. 처음 두 페이지는 소실되고 없다.
- [픽션들]중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민음사, 2003




그들은 거기에 나와 있었다.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켄 키지, 정희성 옮김, 민음사, 2012




그것은 서로 얽힌 잡초와 소용돌이 모양으로 이루어진 아라베스크풍의 알파벳 글자였어요. 그 글자는 희미하고 또 무지개 빛 같은 영상을 띠면서 스크린에 비쳐지고 있었지요. 나는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서 잊혀진 길을 걷듯이 그 아라베스크 풍의 글자에 정신이 팔려 대학교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 글자를 하나씩 하나씩 꼼꼼히 쳐다보고 있었어요.
- 아마티스타, 알리시아 스테임베르그, 송병선 옮김, 열음사, 2006




피아노 선생으로 일하는 에리카 코후트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아파트 안으로 회오리바람처럼 달려들어온다. 딸의 몸놀림이 이따금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에 어머니는 에리카를 '내 귀여운 회오리바람'이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하지만 딸은 어머니에게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다. 나이가 벌써 삼십대 후반인 것이다. 나이로 보면 어머니는 에리카의 할머니뻘이다. 힘겨운 결혼생활이 여러 해 지난 뒤에야 에리카가 태어났다. 그러자 에리카 아버지는 바통을 재빨리 딸에게 넘겨주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에리카가 등장하자 아버지가 퇴장해버린 것이다. 오늘 에리카는 사정 때문에 잽싸게 움직일 수 밖에 없다. 낙엽 더미가 바람에 휙 날리듯 에리카는 쏜살같이 현관문을 지나 어머니 눈에 띄지 않고 자기 방에 들어가려 한다. 그러나 벌써 어머니가 그 앞에 턱 버티고 서서 에리카를 붙들어 세운다. 국가와 가정에서 만장일치로 공인된 이 어머니라는 지위는 종교재판장의 심문권과 총살집행자의 명령권을 동시에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에리카가 왜 이제야 이렇게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오게 되었느냐고 캐묻는다. 피아노를 배우는 마지막 학생이 에리카한테서 잔뜩 비웃음을 사고 벌써 세 시간 전에 집에 돌아갔을 텐데 말이다. "에리카, 네가 어디 있었는지 엄마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딸은 어머니에게 변명을 늘어 놓지만 어머니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딸이 워낙 거짓말을 잘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셋을 셀 때까지 진실을 털어놓으라고 다그친다.
-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이병애 옮김, 문학동네, 2004




"숙부님도 참, 아직도 계속하실 생각이셔요?"
- 안주, 미야베 미유키, 김소연 옮김, 북스피어, 2012




바람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만(灣)을 향해 불어왔다. 그리고 바다의 표면을 완전히 갈가리 찢어 놓아, 어디까지가 액체이고 어디서부터 대기가 시작되는지도 알기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브리 호를 조그만 나무 조각처럼 바닷속으로 처박을 수도 있을 높은 파도를 일으켜 보려고 했다. 그러나 바람은 파도가 30센티미터 높이로 솟아오르기도 전에 무수한 물보라를 거칠게 날려 보냈다.
- 중력의 임무, 할 클레멘트, 안정희 옮김, 시공사, 1996




먹구름이 세상을 휘감아 덮었다. 검은 밤하늘 어딘가에는 만월이 숨어 있을 것이다. 잿빛 구름이 급류처럼 빠르게 서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서쪽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구름을 피해 서둘러 대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내가 타고 있는 빨간색 컨버터블은 구름을 따라가 기어이 화를 당해야 직성이 풀릴 듯, 정확히 서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문학동네, 2012




우리는 그 땅을 [삼각지대]라고 불렀다. 그 이외에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것은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정확하게 삼각형 모양을 한 땅이었던 것이다. 나와 그녀는 그런 땅 위에 살았었다. 1973년인지 1974년인지 그 즈음의 이야기다.
-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 무라카미 하루키, 이경덕 옮김, 파피루스, 1993




예쁘고 머리가 좋고 성격까지 밝은 데다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에 태어난 엠마 우드하우스는 어느 모로 보나 축복받은 아가씨였다. 그리고 21세가 된 지금까지 세상을 살면서 마음이 괴롭거나 수치스러운 일도 거의 겪은 적이 없었다.
- 엠마, 제인 오스틴, 김지선 옮김, 천지인, 2010
by delius | 2012/09/02 21:33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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