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첫 문단 (13)
파리는 4월이다. 빗발도 한 달 전만큼 차갑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까짓 패션 쇼를 보기 위하여 비에 젖으면서까지 나서기에는 너무 으스스하다. 비가 멎기까지는 택시잡기도 쉽지 않거니와, 비가 멎는다면 택시도 별볼일 없다. 기껏해야 몇백 야드밖에 안되는 거리인 것이다. 어쨌든 마땅치가 않다.
- 심야 플러스 원, 개빈 라이얼, 최운권 옮김, 해문출판사, 2004




린들리씨는 올드크로스 마을의 첫 담임 목사였다. 이 작은 부락의 시골집들은 마을이 생겨난 이래 늘 평화롭게 둥지를 틀고 있었으며, 마을사람들은 화창한 일요일 아침이면 작은 길과 농장을 지나 2, 3마일을 걸어 그레이미드의 교구 교회로 가곤 했었다.
- 목사의 딸들, D. H. 로렌스, 백낙청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1




그 엄청난 사건이 뜻하지 않은 형태로 해결되기 시작했을 때, 그 주변에서 몇 건의 부자연스러운 사체가 나왔다는 건 그다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 악과 가면의 룰, 나카무라 후미노리, 양윤옥 옮김, 자음과모음, 2011




올 여름에 나는 까날+에서 방영한 포르노 영화를 처음으로 보았다. 텔레비전에는 데코더를 달지 않아 화면이 흔들리고, 끊이지 않고 부드럽게 들리는 대사는 미지의 언어처럼 지직거리고 쇄액거리는 이상한 음향으로 변했다. 스타킹에 코르셋을 한 여자와 남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어떤 동작이며 어떤 몸짓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갔다. 화면 가득히 여자의 비밀스러운 곳이 나타났고, 그것은 화면이 번쩍거리는데도 아주 뚜렷하게 보였다. 그러더니 발기한 남자의 성기가 여자의 그곳으로 미끄러지듯 삽입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두 남녀의 정사 장면이 여러 각도에서 비춰졌다. 남자의 손에 움켜쥐어진 성기가 다시 보여지고 정액이 여자의 배 위로 쏟아졌다. 대개는 이런 장면에 익숙해져 있겠지만 처음 보는 나로서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옛날 같으면 죽을 때까지 볼 수 없었던 정사 장면이나 남자의 정액을 수 세기가 흐르고 여러 세대를 지난 오늘날에는 거리에서 악수를 나누는 것만큼이나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강만호 옮김, 산호, 1993




"아빠가 도끼를 어디로 가지고 가세요?"
- 우정의 거미줄, E. B. 화이트, 김경 옮김, 창작과비평사, 1985




……그러나 곤욕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파멸의 은혜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서리치는 구원을 생각하면 기쁘기까지 하답니다. 내가 믿기로, 나만이 우리 인류 가운데서, 나만이 인류의 기억에서, 파선(破船)을 경험하고도 버려진 배에 갇혀 본 유일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 전날의 섬, 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6




넌 앞으로 육 개월 뒤에 죽어.
- 러브 케미스트리, 기타 요시히사, 최고은 옮김, 21세기북스, 2012




나이와 성性을 불문하고 향락을 쫓는 이여, 오로지 당신들에게 나는 이 책을 헌정한다. 이 책의 원칙들을 마음에 품어라. 이 원칙들은 당신의 정념에 호의적이다. 엄숙하고 따분한 도덕군자들이 당신을 을러댔던 것이 이 정념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연이 부여한 목적에 인간이 이르게 하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일 뿐이다. 이 관능적인 목소리만을 들어라. 그 목소리야말로 당신을 행복으로 인도할 유일한 것이다.
- 규방철학, 도나티앙 알퐁소 프랑소아 드 사드, 이충훈 옮김, 도서출판b, 2008




이제 또 다른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있지만 스패터 시의 시민들이 그해 겨울에 일어났던 일들을 잊으려면 상당히 오랜 세월이 걸려야 할 것이다.
- 호그 연속살인, 윌리엄 디안드레아, 박종성 옮김, 모음사, 1987




아르바뜨 거리에 있는 가장 큰 건물은, 지금 쁠로뜨니꼬프 가와 베스닌 가라고 불리는, 니꼴스끼 가와 제네쥐니 가 사이에 있다. 8층짜리 건물 세 동이 포개어 놓은 듯이 바짝 붙어 있었는데, 거리에 면해 있는 제일 앞의 건물 외벽에는 흰 타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자수를 놓아 드립니다>, <말더듬이 교정>, <성병과 비뇨기 전문>이라고 쓴 간판들이 붙어 있었다. 낮은 아치 모양의 철판을 씌운 복도가 두 개의 깊고 어두운 안뜰을 연결하고 있었다.
- 아르바뜨의 아이들, 아나똘리 리바꼬프, 홍지웅·이갑수 옮김, 열린책들, 1994




녹색 와인병이 바닥에 떨어졌다.
- 최후의 증인, 유즈키 유코, 한성례 옮김, 도서출판혼, 2011




"지금 뭐라고 하는 거요? '배고픈 건 잊어라? 척이 여기 있었는데, 인종주의자 경찰의 총에 등을 맞은 건 잊어라? 척이 할렘으로 와서…….'"
- 허영의 불꽃, 톰 울프, 이은정 옮김, 민음사, 2010




회색 로커와, 가벼운 진동에도 유리문이 덜컹거리는 책꽂이. 물건이라곤 그것밖에 없던 방에 책상과 소파와 테이블과 벽시계, 관엽식물을 들여놓았다.
- 개는 어디에, 요네자와 호노부, 권영주 옮김, 문학동네, 2011




조셉 룰르타뷰가 우연히 만나게 된 기괴하기 짝이 없는 사건을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려 하니, 나 역시 어떤 흥분을 느끼게된다. 오늘까지 룰르타뷰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고 있었고, 나도 지난 15년 사이에 걸쳐 일어났던 어떤 사건 중에서도 가장 불가사의한 사건인 이 이야기를 언젠가 공표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은 아예 단념하고 있었던 터였다. 뿐만 아니라 만일 그 고명한 스탕제르송 박사가 최근 레종 도뇌르 훈장인 그랑 크로아를 받은 일과 관련해서 한 석간지가 딱하게 여겨야 할 무지(無知)라고도, 또는 뻔뻔스러운 불신 행위라고도 할 그런 기사 중에서, 조셉 룰루타뷰가 영원히 잊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내게 말한 그 놀라운 사건을 또다시 들추는 일만 없었어도, 불가사의하고도 잔인하고, 선풍적인 갖가지 드라마를 낳게 하고, 또한 우리의 친구 룰르타뷰가 스스로 깊숙이 그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섰던 '노란 방'의 사건이라고 불리는 기괴한 사건에 관해서 세상 사람들은 그 '모든 진상'을 끝내 알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 노란방의 비밀, 가스통 르루, 최운권 옮김, 해문출판사, 2001




어머니의 모습.
- 도쿄공원, 쇼지 유키야, 김성기 옮김, 21세기북스, 2011
by delius | 2012/04/26 00:14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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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까날 at 2012/04/26 02:39
까날+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네요........
Commented by delius at 2012/04/26 08:35
- 까날님: 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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