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첫 문단 (12)
거무스름한 어둠 속으로 복도의 백열등 불빛이 흘러들어왔다.
- 심홍, 아카가와 지로, 임은경 옮김, 서울문화사, 2010




잠결이었다. 아련히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들으며 그는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집요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깨어났다.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송수화기를 떨어뜨릴 듯 잡고는 여보세요, 중얼거렸다. 저쪽의 목소리는 다급하게 어디의 누구라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 빨래터, 이경자, 문이당, 2009




칙칙한 검은색 타이어와 녹슨 체인, 손때와 빗물에 얼룩진 핸들과 도색이 벗겨진 벨. 그런 부품들로 이루어진 자전거가 잡초처럼 끝없이 늘어서 있다.
- 오아시스, 이쿠타 사요, 김난주 옮김, 황매, 2005




자명종 라디오는 정확히 아침 뉴스 시작 2분 전에 켜진다. 오랫동안 지켜 온 나만의 습관이다. 뉴스 시작 2분 전에 잠에서 깨면, 눈을 뜨고 일어나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서랍장을 열고 전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정성스레 손질해 둔 357 매그넘 권총을 꺼낼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뒤 머리맡에 놓아 두었던 물 컵에 아스피린 한 알을 넣는다. 아스피린은 보글보글 거품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물이 녹아든다. 난 단숨에 반 정도를 비워 버리고 번쩍이는 권총을 총신을 입으로 향한 채 방아쇠를 당긴다. 머리가 산산조각 난다. 지난여름에 발라 놓은 감청색 벽지(반짝이는 별 장식도 있다) 위로 분해 된 내 두개골 조각들이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한 무더기의 뇌하수체가 물 컵 속으로 떨어진다. 내 몸에서 나온 피가 내 방을 아주 빨갛게 '청소'해 준다. 비록 그 2분 때문에 잠은 조금 설치겠지만, 무방비 상태로 아침 뉴스를 듣는 고역을 치르느니 차라리 그렇게 죽는 편을 택하겠다. 그러고 나면 한결 개운해지기 때문이다.
- 완벽한 하루, 마르탱 파주, 이승재 옮김, 문이당, 2005




세종이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곳은 물탱크안이었다.
- 물탱크 정류장, 태기수, 생각의나무, 2010




말씀 계속하세요, 하고 나는 상담하러 온 방문객에게 말한다. 여느 때의 습관대로,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미리 짐작하고, 그 솔직성에 의문을 품는다. 방문객은 계속 불평을 늘어놓고, 제 허물은 제쳐놓은 채 남만 헐뜯는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말꼬리를 흐리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말만 장황하게 되풀이하고,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고 한다. 그는 상황을 절망적으로 생각하고, 나는 흔해빠진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충격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견딜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살하겠다는 뜻을 넌지시 비치고, 나는 흘려듣는다. 그는 내가 도와줄 힘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오해인가를 나는 상대에게 알려줄 수가 없다.
- 방문객, 콘라드 죄르지, 김석희 옮김, 시공사, 2011




그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 어둠 아래, 아쿠마루 가쿠, 양수현 옮김, 북홀릭, 2011




아침에 눈을 뜨면 왼쪽으로 돌아눕는디. 침대 가장자리로 가 심장을 아래로 하고 오른손을 뻗어 사이드테이블 위 자명종 시계의 스위치를 끈다. 벨이 올리기 2, 3분 전이면 눈이 저절로 떠진다. 다시 오른손을 몸 아래로 내려 나를 향한 채 잠든 나쓰의 아랫배를 만진다. 으응~, 나쓰는 가벼운 하품을 하며 몸을 바싹 붙여온다.
- 해결사, 우미노 아오, 김주영 옮김, 멜론, 2011




이브 닐은 네드 아투드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했으나 네드 측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혼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네드가 어떤 유명한 여자 테니스 선수와 놀아났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그것은 이브가 이혼소송을 제기할 만큼 그렇게 큰 스캔들은 아니었다.
- 황제의 코담뱃갑, 존 딕슨 카, 전형기 옮김, 동서문화사, 2003




키가 큰 남자가 전등을 켰다. "곧 끝날 겁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 독약 한 방울, 샬롯 암스트롱, 김석환 옮김, 해문출판사, 1992




골목은 대니가 바란 만큼 어둡지 않았다. 게다가 에번마저 꼭 술 취한 카우보이처럼 총신이 짤따란 리볼버를 빙빙 돌리며 성질을 긁어 댔다.
-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입힌다, 마커스 세이키, 장성주 옮김, 황금가지, 2010




스테인드글라스로 비쳐드는 바깥 빛이 예배당 안을 안개처럼 옅은 빛으로 채우고 있었다. 제단 앞에는 그 빛과 하얀 제복을 휘감아 성스럽게 빛나는 사제와, 그 발치에 두 사람의 신도가 무릎을 꿇고 바싹 붙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눈을 감고, 평화의 찬가인 아뉴스 데이(신의 어린양)의 기도를 주께 바치고 있었다.
- 금단의 팬더, 다쿠미 츠카사, 신유희 옮김, 끌림, 2008




우리는 교정에 깔아 놓은 모래 위에 서 있었다. 면회실 유리문에 반사된 빛이 우리 발치께로 갑작스럽게 지나갔다. 산토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페르미나 마르케스, 발레리 라르보, 정혜용 옮김, 시공사, 2011




아무 현 아무 시에 소재한 세이난전기공과대학. 고만고만한 도시에 고만고만한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는 이 대학은 이공계의 숙명으로 끔찍이도 과제가 많은 지극히 평범한 공과대학이다. 그리고 이 세이난대학의 수많은 동아리 중에 '기계제어연구부'가 있었다.
- 키켄, 아리카와 히로, 임은경 옮김, 북로드, 2011




슬슬 이곳을 나가야 한다.
- 격투하는 자에게 동그라미를, 미우라 시온, 권남희 옮김, 들녘, 2007
by delius | 2012/02/26 19:33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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