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첫 문단 (11)
"다 왔다! 어휴, 힘들어!"
- 로맨틱가도 살인사건, 아카가와 지로, 임은경 옮김, 서울문화사, 1997




1963년 여름.


나는 프티고아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프리고아브는 포르토프랭스에서 서쪽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다. 남부 국도를 따라 가노라면 타피옹 산이 나오는데, 이 산을 돌아 넘으면 바로 프티고아브가 있다. 트럭(보나마나 당신도 트럭으로 여행할 테니까)을 몰고 가다가 경비대 막사(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앞에서 조용히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시라. 그런 다음, 완만한 비탈길을 올라가면 라마르 가 88번지에 이르게 된다.
- 커피 향기, 다니 라페리에르, 김석희 옮김, 정신세계사, 1994




두광인頭狂人은 자택의 자기 방에 있다. 4LDK 분양맨션에 속한, 다다미 여섯 장 크기의 서양식 방이다.
- 밀실살인게임, 우타노 쇼고, 김은모 옮김, 한스미디어, 2010




비행기 소리가 아니었다.
-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안재찬 옮김, 예하, 1997




… 내 기억은 모두 어떤 계절의 색깔로 물들어 있다. 그것은 영화 필름이 각 화면마다 다양한 색깔을 띠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기억의 필름 색은 언제나 정확한 달력상의 계절과 일치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여름날 있었던 일이 가을의 느낌으로 떠오를 때도 있고, 가을의 일들이 늦은 봄의 달콤한 색으로 물들어 생각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느 해 겨울을 떠올리면, 겨울에 삼일 간 계속해서 일어났던 일이 ― 첫날은 정말로 겨울처럼, 그 다음날은 봄, 또 그 다음날은 가을의 일이었던 것처럼 착각될 때도 있다. 이것은 그 사건의 성질이나, 그때의 내 마음 상태, 그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 용모 등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 겨울집, 아베 도모지, 이원희 옮김, 소화, 1996




"스물네 명의 구릿빛 노예들이 호화찬란한 갈레선(船)의 노를 저었습니다. 이 배는 암기아트 왕자님을 모시고 고향, 칼리프의 궁전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왕자님께서는 진홍빛 망토로 몸을 감싸고 갑판 위에 홀로 누워 계셨습니다. 검푸른 저녁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고, 그리고 왕자님이 시선이――"
- 꿈의 노벨레, 아르투어 슈니츨러, 백종유 옮김, 문학과지성, 1997




'쪼갠 보리 언덕'으로 이어지는 긴 언덕길 중턱까지 올라갔을 쯤에 젊은이는 종소리를 들었다.
- 영웅의 서 1, 미야베 미유키, 김은모 옮김, 문학동네, 2010




"어이쿠!" 피터 윔지 경이 소리쳤다.
- 나인 테일러스, 도로시 세이어스, 허문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3




끝없이 펼쳐진 참억새 들판은 서쪽 하늘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 방금 전까지 사방을 불의 바다처럼 활활 태우고 있던 석양은 어느덧 밤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구름에 밀려 하늘 끝자락으로 밀려나, 붉은 빛깔의 먹처럼 어두운 색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있다.
- "저녁싸리 정사" [저녁싸리 정사], 렌죠 미키히코, 정미영 옮김, 시공사, 2011




'사쿠라다 문櫻田門 밖의 사건'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아리무자 지자에몬 가네키요有村治左衛門兼淸가 에도江戶의 한테이藩邸에 근무하기 위해 고향 사쓰마薩摩를 떠난 것은 사건 전년인 안세이安政 6년(1859년) 가을이다. 당시 스물두 살.
- "사쿠라다 문 밖의 사건" [막말의 암살자들], 시바 료타로, 이길진 옮김, 창해, 2005




그건 아내로서는 최악의 악몽이었다. 결혼 9년 만에, 락스미는 미란다에게 말했다. 그녀의 사촌 형부(兄夫)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형부는 델리에서 몬트리올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그 여자 옆에 앉았다. 형부는 아내와 아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그 여자와 함께 히드로 공항에서 사라져 버렸다.
- "섹시" [축복 받은 집], 줌파 라히리, 이종인 옮김, 동아일보사, 2001




오래도록 나는 내가 태어났을 때의 광경을 보았노라고 우겼다. 그말을 꺼낼 때마다 어른들은 웃었고, 나중에는 얘가 나를 놀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지 이 창백하고 어린애답지 않은 아이의 얼굴을 가벼운 미움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다 별로 가깝지 않은 손님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자칫 백치인 줄로 오해할까 걱정하신 할머니는 다소 엄한 목소리로 내 말을 가로막으며 저쪽에 가서 놀라고 하셨다.
- 가면의 고백, 미시마 유키오,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2009




바람에 코트 깃을 여몄다.
- "아이돌의 본분" [츠나구], 츠지무라 미즈키, 김선영 옮김, 문학사상, 2010




그 지하실은 몇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방 하나를 제외한 이 몇 개의 움 같은 방 속에는 흔히 낡은 옛날 집 지하실에 쌓여 있는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차 있었다 ―― 망가진 자전거, 낡고 곰팡이가 피어 있는 가죽 트렁크, 나무 상자, 다리가 없거나 팔걸이가 떨어져 나간 의자, 금이 간 도자기, 끈으로 묶어둔, 누렇게 된 옛날 신문다발들, 아주 오래 전에는 갖가지 기계나 기구에 달려 있었거나 연결되어 있었을, 지금은 정체불명이고 용도불명인 금속제 원통이며 파이프, 막대, 바퀴, 용수철 등등. 이런 잡동사니에는 어느 지하실에나 있기 마련인 먼지와 그을음이 덕지덕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나 그을음과 곰팡이내가 가득차 있었다.
- 내 눈에 비친 악마, 루스 렌델, 강호걸 옮김, 해문출판사, 2003




인테리어 잡지에서 본 붙박이형 열대어 수조만큼, 요즘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없었다.
- 엔젤 엔젤 엔젤, 나시키 가호, 햇살과나무꾼 옮김, 메타포, 2008
by delius | 2011/12/12 23:35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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