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첫 문단 (9)
깊은 밤, 주위에 고요한 정적이 흐를 때면 의자에 깊숙이 걸터앉아 눈을 감곤 한다. 그때 떠오르는 것은 도장이라도 찍은 듯 항상 똑같은 광경이다.
- 신세계에서 1, 기시 유스케, 이선희 옮김, 시작, 2010




다시 병원이다. 사람 없는 긴 복도에 나의 발소리가 느리게 뚜벅뚜벅 울렸다. 나는 병원이 싫고 병원 냄새도 싫었다. 새로 칠한 광택제가 빛나는 장식 없는 나무 널도, 먼지 없는 창틀도, 엄마와 함께 허겁지겁 지나가는 내 뒤틀린 모습을 비추는 크롬 광선도 싫었다. 나는 낯선 곳을 방문한 꾀죄죄한 다섯 살 꼬마였다.
- 니웅가의 노래, 샐리 모건, 고정아 옮김, 중앙북스, 2009




목을 매단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내가 겨우 다섯살이었다는 게 다행이다. 열 살이었다면 큰 소리로 울었을 테고, 열다섯 살이었다면 마음의 병을 앓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웃었겠지. 스무 살. 이제 나는 사람이 우스꽝스럽지 않아도 웃는다는 걸 알고 있다.
- '메뉴', [공주님], 야마다 에이미, 김옥희 옮김, 민음사, 2003




나의 새 스웨터는 눈이 멀도록 새빨갛다. 그리고 흉측하다. 그날은 5월 12일이었음에도 기온이 5도 아래로 내려앉는 바람에, 게다가 남방 하나로 나흘을 버티며 벌벌 떨다가, 일찌감치 넣어둔 겨울옷 상자를 파헤치느니 재고품 세일에서 스웨터 한 장을 집어 들었던 것이다. 시카고의 봄.
- 그 여자의 살인법, 질리언 플린, 문은실 옮김, 바벨의 도서관, 2009




1990년 10월 3일, 화요일 아침 10시 30분. 나는 여덟 번째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타자기로 쳤다. 비평가들은 이 소설이 그들이 칭하는 바 <그랜쯜러 8부작>을 완결 짓는 소설이라고 말하겠지만, 사실 나는 처음부터 동일한 주제를 놓고 여덟 권의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어떻게 하다 보니까 정말 그렇게된 것뿐이었다.
- 소설, 제임스 미처너, 윤희기 옮김, 열린책들, 1992




기타야마 마사미치는 바쁜 걸음을 옮겼다.
- 물의 미궁, 이시모치 아사미, 김주영 옮김, 씨네21북스, 2010




나는 이진.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입니다. 나와 결혼하려고 마음먹은 당신에게, 이런 식의 소개는 몹시 당황스럽겠지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고향은 어디고 무슨 학교를 나왔으며 어떤 취미를 가졌는지 소개할 수 있으면 정말로 좋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럴 수 없는 운명이랍니다.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나는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 이진입니다.
- 이현의 연애, 심윤경, 문학동네, 2007




복사기와 씨름하는 신입사원 다테노의 옆모습을 바라보자니 그 턱선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말았다. 수염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부족한 새하얀 솜털이 나 있어서 어젯밤 먹은 복숭아가 떠오르기도 한다. 장난삼아 만져보려고 손을 뻗히자, 무슨 착각을 했는지 "자, 잠깐만요. 이 버튼 맞죠? 이걸 누르면 되죠?"하며 허둥지둥 자동분류 버튼을 누르더니 "아하, 역시"하고는 자랑스러운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나날의 봄', [도시여행자], 요시다 슈이치, 이영미 옮김, 노블마인, 2010




콘라드 랑이 돌아왔을 때는 벽난로 속에 들어있던 장작만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 스몰월드, 마틴 수터, 유혜자 옮김, 시공사, 2005




알바가 파리의 생제르맹 잡화점 유리창 앞을 지날 때, 세 남자가 가게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알바를 보았을 때, 첫번째 남자는 스푼을 삼킬 뻔했고 두번째 남자는 발작하듯 스푼을 빨았다. 세번째 남자는 테이블 위에 30프랑을 던져 놓고는 자리에서 뛰쳐나와 알바를 뒤쫓았다. 그들이 본 것은 긴 금발머리에 몸에 착 달라붙은 빨간 옷에 부츠를 신은, 늘씬한 십대 초반의 소녀였다.
- 디바, 델라코르타, 안선덕 옮김, 고려원미디어, 1991




"한마디로 말해서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대로 방치해두면 죽을 게 확실해요. 하루라도 빨리 입원해야 합니다."
- 달콤한 나, 히라야마 미즈호, 김동희 옮김, 스튜디오본프리, 2007




이제는 이미 물 속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 늙은 ㅋ프우프ㅋQfwfq는 회상했다. - 성큼성큼 걸어 다니기로 결정을 내리는 자들이 더욱더 늘어났으며, 자기 친척들 중 누구라도 저 마른 땅에서 살지 않는 가족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들 단단한 땅 위에서 해야 할 신기한 일들을 이야기했고 친척들을 불러들였지요. 이제는 아무도 젊은 물고기들을 물 속에 붙잡아 두지 않았으며, 그들은 진흙 기슭 위에서 지느러미를 파닥거리면서, 좀더 재능있는 자들이 해내었듯이, 발처럼 움직이는가 시험해 보았답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무렵 우리들 사이에 차이점들이 더 뚜렷해졌습니다. 즉, 몇 세대 전부터 땅 위에서 살아온 가족도 있었는데, 그런 젊은이들은 이제 양서류도 아니고 거의 파충류에 가까운 몸짓들을 자랑하고 있었어요. 또한 아직도 물고기로 남아 있는, 아니, 오히려 옛날의 물고기들 이상으로 더욱 물고기로 변해 가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 코스미코스케, 이탈로 칼비노,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1994




"그럼 경위님은 왜 여기 있는거죠?"
- 부활하는 남자들 1, 이언 랜킨, 양선아 옮김, 영림카디널, 2005




'페르마타'는 내가 포울드를 일컫는 많은 이름들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나는 나의 자서전을 페르마타라고 이름지으려 한다. 분명 '포울드'는 페르마타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너무도 자주, 가을이면 (아마 그때면 세속적으로 나의 호르몬 분비가 최고조에 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나는 내게 포울드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포울드 안에 들어가는 것은 주변의 세계가 정지하거나 중지된 반면 나 자신은 생기를 느끼며, 보행을 하며, 사고를 하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가변적인 길이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지난 몇 해 동안 나는 시간의 정지를 촉발하는 여러 가지 기술을 터득해야만 했다.
- 페르마타, 니콜슨 베이커, 정영문 옮김, 문학세계사, 1995




그렇게 우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 스코틀랜드야드 게임, 노지마 신지, 금정 옮김, 스튜디오본프리, 2007
by delius | 2011/11/24 23:03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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