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첫 문단 (6)
17번가와 브로드웨이가 만나는 교차로의 신호등은 아직 빨간 색이었다. 하지만 성급한 노란 택시들은 그 좁은 도로를 먼저 지나겠다고 앞다투어 빵빵거렸다. 나는 지금 이렇게 복잡한 도심을 헤치며 운전하고 있다. 클러치, 액셀, 변속기(중립에서 1단인가? 1단에서 2단인가?), 클러치 떼고.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지만 안정이 되지 않았다. 끽끽 브레이크를 밟아대는 차의 홍수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몰고 있는 작은 차는 교차로를 지나는 동안 두어 번이나 덜커덕거리며 비틀댔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덜커덕거리던 차가 제자리를 잡더니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발랐다. 눈으로 확인해보니 기어는 겨우 2단에 있는데 앞 택시 뒷부분이 어찌나 크게 보이던지…… 다급한 나머지 브레이크를 확 밟아버렸다. 툭, 구둣굽이 부러졌다. 이런 젠장! 7백 달러짜리 구두 한 짝이 또 희생되는군. 이번 달에만 벌써 세번째다. 그나마 차가 멈춰서 다행이었다. 마놀로 구두를 벗어 조수석으로 던져버릴 시간이 몇 초 생긴 거니까. 그나마도 빵빵대는 클랙슨 소리와 사방에서 날아오는 온갖 욕설을 못 들은 척 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땀에 젖은 손을 닦을 데라곤 마지막 단추를 채우자마자 허벅지와 엉덩이를 조이며 몸에 꽉 끼는 구찌 스웨이드 바지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허벅지를 감고 있는 부드러운 스웨이드에 땀을 닦고 말았다. 점심시간에 8만 4천 달러짜리 수동 컨버터블을 몰고 사방이 장애물인 미드타운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려니 신경이 곤두섰다. 담배가 땡겼다.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로렌 와이스버거, 서남희 옮김, 문학동네, 2006




기분 나쁜 꿈을 꾸었다.
- 얼굴에 흩날리는 비, 기리노 나쓰오, 권일영 옮김, 비채, 2010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하지만 밤의 공기는 달콤한데 비해 그의 기분은 씁쓸했다. 벌레라도 씹은 듯이 잔뜩 찌푸린 그의 표정은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늘에 가득차 있고, 때로는 몇 시간이나 가슴에 뿌리박혀서 도무지 풀리지 않는 그런 처치곤란한 울분이었다. 그것은 또 주위의 모든 것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어서 매우 보기 흉한 느낌이 들었다. 주위 일대의 정경 중에서 그것만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 환상의 여인, 윌리엄 아이리시, 최운권 옮김, 해문출판사, 1989




너는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벌써 몇 장째 팔각시계를 그리고 있었다. 마지막 것은 바늘은 없고 문자판뿐이다.
- 턴, 기타무라 가오루, 이재오 옮김, 황매, 2009




정신이 들어 보니 오다기리는 겨우 한 사람이 지날 수 있을 것 같은, 숲 속의 짐승이나 다니는 좁은 길을 휘청거리며 걷고 있었다. 꿈에서 금방 깨어난 것 같기도 하고 혹은 한밤중에 한번 잠이 깼다가 이제까지 꾸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혹은 한밤중에 한번 잠이 깼다가 이제까지 꾸고 있었던 꿈 속으로 다시 들어간 것 같기도 한 그런 기분이었다. 길은 진창이 되어 있어서 스니커에는 질퍽질퍽하고 더러운 흙탕물이 스며들어왔다. 지독히 춥다. 의식이 몽롱한 것은 이 추위 탓도 있어, 하고 오다기리는 생각했다. 자신이 걷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 것은 겨우 2, 3분 전이었다. 앞에도 뒤에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다기리의 앞에서 걷고 있는 것은 커다란 배낭을 걸머진, 체격을 봐서 판단하면 남자인 듯했다. 한 번 이쪽을 돌아보았지만 얼굴은 알 수 없었다. 주위가 나뭇잎에 덮여서 어둡기 때문은 아니다. 그 남자는 방독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다.
- 오분 후의 세계, 무라카미 류, 이창종 옮김, 웅진출판, 1995




남자는 포마드를 잔뜩 바른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매끈하게 가다듬었다. 예술의 규칙 안에서 희생자와 맞닥끄리기 위해서는 우선 그럴듯하게 보여야만 하는 법.
- 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 성귀수 옮김, 문학세계사, 2002




끝없이 줄줄이 완만한 경사로 이어져 있는 언덕길을 끝까지 올라가면, 목적지인 교고쿠도[京極堂]가 있다.
- 우부메의 여름, 교고쿠 나츠히코, 김소연 옮김, 손안의책, 2004




노오랗게 피었던 장충단 공원의 개나리는 지기 시작한다. 공원 주변의 언덕과 산비탈에 꽉 들어앉은 소쇄한 양관洋館들, 그 형형색색의 양관들의 담 너머로부터 마치 쏟아져 나온 듯한 라일락, 벚나무, 은행나무, 또는 줄장미 그 밖의 여러 가지 수먹에는 새순이 돋아나서 아스름한 연둣빛을 자아내고 있다. 그 연한 푸르름 위로 청자색 아지랑이가 흔들리면서 봄은 눈부신 햇빛 아래 무르익어 가는 것이다. 아니 봄은 벌써 노곤한 자태로 행복과 권태에 겨운 것같이도 느껴진다.
- 성녀와 마녀, 박경리, 인디북, 2003




내 귀의 저 안쪽, 고막 가까이에는 제법 성능이 괜찮은 은색의 소리굽쇠가 꽂혀 있다. 그 소리굽쇠가 갑자기 울렸다. 나는 재일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파이프 침대를 삐걱거리며 천천히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 때문에 귀에 꽂혀 있던 광석 라디오의 이어폰이 쏙 빠져나와 바닥에서 3센티미터 정도의 높이에서 진자처럼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 게르마늄의 밤, 하나무라 만게츠, 양억관 옮김, 씨엔씨미디어, 1999




객실, 객실 그리고 또 객실.
- 우리 모두 잘못이다, 알베르트 바스케스 피게로아, 정구석 옮김, 책세상, 2005




우리는 언젠가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을 더 많이 알게 된다.
- 시티즌 빈스, 제스 월터, 이선혜 옮김, 영림카디널, 2008




퀸 아파트의 낡은 테이블에 다섯 사람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 중에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눈빛이 날카로운 헨리 샘프슨 지방검사의 모습도 보였다. 샘프슨 옆에는 뉴욕 경시청의 마약반장인 살바토레 피오렐리가 심술궂은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그는 몸집이 큰 이탈리아 사람으로 오른쪽 볼에는 검게 칼자국이 나 있었다. 샘프슨의 보좌관인 붉은 머리의 티모시 크로닌의 얼굴도 보였다. 리처드 퀸 경감과 엘러리 퀸은 서로 어깨를 기대고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은 전혀 달랐다. 경감은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엘러리는 피오렐리의 상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프랑스 파우더의 비밀, 엘러리 퀸, 이제중 옮김, 시공사, 1994




월요일 아침이었다.
- 날라리 on the pink, 이명랑, 세계사, 2008




미키코[幹子]의 방은 그녀 스스로 내뿜는 긴장과 분도의 열기 때문에 공기가 흐려져 있었다. 거울에 얼굴을 가까지 대고 미키코는 작은 펜슬 루주로 입술을 덧칠했다. 뜨거운 샤워를 하고 나온 몸은 달아올라, 아깨를 타고 미끄러지는 슬립 끈 아래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콧등에 솟은 작은 땀방울을 바닥에 떨어져 있던 베스타월로 닦아내고 그 참에 벗겨진 파운데이션은 화장용 스펀지로 다시 발랐다.
- 꿈을 주다, 와타야 리사, 양윤옥 옮김, 중앙북스, 2007




늘 그렇지만, 쥐는 생각보다 몸집이 크다.
- 베누스의 구리 반지, 린지 데이비스, 정회성 옮김, 황금가지, 2005
by delius | 2011/05/10 14:27 | underline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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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첫 문단 (6)</a> 5위: 소설(11회)|<a style="COLOR: #999" href="http://delius.egloos.com/4572818" target="_new">소설의 첫 문단 (6)</a>1위: 도서(41회)|[밑줄] 그냥, 알 수 있다오 2위: 음악(9회)|가디너 모차르트 오페라 박스 세트 3위: 여행(6회)|히로시마 여행 (2) 4위: 이글루스(4회)|2006~2008 이글루스 TOP 100 분석 5위: 음식(4회)|제 ... more

Commented by keachel at 2011/05/11 11:17
시티즌 빈스의 첫 문단이 상당히 괜찮네요..
재미있게 읽었는데 첫 문단이 생각 안나다니..; (OTL....)
근래 나온 작가의 다른 소설도 꽤 기대중입니다~!
Commented by delius at 2011/05/11 21:14
- keachel님 : 저도 새로운 느낌 ^^ / 와 새 책이 나왔군요!!!
Commented by keachel at 2011/05/17 09:46
'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라는 책이 나왔더라구요..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간략한 내용만 보면 '시티즌 빈스'에서 볼 수 있었던 유머러스함을 볼 수 있을듯합니다. (+_+)
Commented by delius at 2011/05/17 22:00
- keachel님 : 전 그런 유머러스한 점이 무지 좋더라구요! :-)
Commented by 당고 at 2011/07/20 20:17
우와-
이 시리즈, 계속되는 건가요?
흥미진진한 시리즈군요 :)
Commented by delius at 2011/07/20 21:45
- 당고님 : 와 흥미진진하게 봐주셔서 감사~ 얼릉 다음편을 올려야겠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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