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첫 문단 (3)
겨울, 밀라노. 조용한 교외의 가로변에 값비싼 차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가로수 뒤편의 커다란 건물 안에서 수업 종료의 벨 소리가 희미하게 퍼져나왔다. 그리고 몇 분 후 겨울 바람을 막아내기 위해 외투 깃을 올린 어린애들이 계단을 재빨리 달려내려와 대기중인 차들 쪽으로 달려갔다. 차는 히터를 오해 전부터 틀어놓아 따뜻한 상태였다.
- 크리시1-불타는 사나이, A. J. 퀸넬, 이종인 옮김, 시공사, 1999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 총살대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얼음 구경을 나섰던 그 아득한 오후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 시잘의 마콘도는, 선사시대의 공룡알처럼 거대하고 매끈한 흰 돌들 위로 투명한 물이 세차게 흐르는 강변을 따라, 스무 채 가량의 흙담집이 늘어서 있는 작은 촌락이었다. 세상이 막 태동했을 무렵인 그때에는 이름없는 사물이 많아 그것들을 지칭하기 위해선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야만 했다. 해마다 3월이 되면 마콘도에는 누더기를 걸친 집시들이 몰려와 마을 어귀에 이동식 천막을 치고 북나팔을 요란스레 울려대며 새로 나온 발명품을 선전하곤 했다. 그들이 처음 가져온 발명품은 자석이었다. 뚱뚱하고 참새손에다 수염이 제멋대로인 집시가 스스로를 멜키아데스라고 소개하더니, 세계 8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이며 마케도니아의 연금술사들이 만들어 냈다는 자석의 위력을 가차없이 실증해 보였다. 그가 쇠막대 두 개를 끌고 이집저집을 돌아다니자 사람들이 무척이나 놀랐다. 냄비며 프라이팬, 화젓가락, 화로들이 제자리에서 마구 넘어지는데다 못이며 나사들이 빠져 나오려 아우성을 치는 통에 나무기둥이 삐걱거렸으며, 심지어는 오래전에 잃어버려 아무리 애써도 찾을 수 없었던 물건들이 나타나 멜키아데스의 요술 막대에 철커덕 달라붙어, 그 시끌벅적한 쇠붙이 행렬에 합세했던 것이다.
- 백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마르케스, 임호준 옮김, 고려원, 1996





질문, 끝없는 질문들. 그들은 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질문을 겹겹이 쌓아올리며, 모든 순간을 질문으로 뒤덮으며, 질문의 가시에 찔린 통증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차단하며 달려든다.
- 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정소연 옮김, 북스피어, 2007





로마 교황청에 한 가지 보고가 들어왔다. 포르투갈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가 나가사키(長崎)에서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배교(背敎)를 맹세했다는 것이다. 이 페레이라 신부는 일본에 체류한 지 33년이 되는데, 주교(主敎)라는 최고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사제와 신도들을 통솔해 온 성직자이다.
- 침묵, 엔도 슈사쿠, 공문혜 옮김, 홍성사, 2003





이 이야기는 아주 옛날 여러분의 할아버지가 어린아이였을 때 일어난 일이다. 이 이야기는 나니아 나라와 우리 세계 사이를 맨 처음에 어떻게 오고 가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 나니아 나라 이야기 1-마법사의 조카, C. S. 루이스, 햇살과나무꾼 옮김, 시공주니어, 2002





나는 죽음 담당이다. 죽음이 내 생업의 기반이다. 내 직업적인 명성의 기반도 죽음이다. 나는 장의사처럼 정확하고 열정적으로 죽음을 다룬다. 상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슬픈 표정으로 연민의 감정을 표현하고, 혼자 있을 때는 노련한 장인이 된다. 나는 죽음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죽음을 다루는 비결이라고 옛날부터 생각했다. 그것이 법칙이다. 죽음의 숨결이 얼굴에 닿을 만큼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게 하면 안된다.
- 시인, 마이클 코넬리, 김승욱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비 오는 날, 나는 이 집에 왔다.
- 혼자 있기 좋은 날, 아오야마 나나에, 정유리 옮김, 이레, 2007





연극이 끝나고 이윽고 박수가 터져나오기까지의 사이에 막을 내려버린 듯한 정적이 실내를 덮었다. 그 정적에 마음을 빼앗긴 체이핀은 통로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미국인에게서 자신도 모르는 새에 한눈을 팔고 말았다.
- 르윈터의 망명, 로버트 리델, 강호걸 옮김, 해문출판사, 1992





다바오 항을 떠나자마자 심한 풍랑을 만남. 나선을 그리며 회색 어둠을 한없이 추락하는 듯. 필리핀에서 탄 승객 중에 고생하는 자 다수. 선내에 토사물 내가 진동. 청소를 거드는데 한 승객이 가라안지는 않겠지 하고 묻기에 괜찮다고 대답. 사실을 배가 출렁일 때마다 마음 한구석으로 죽음을 각오. 그러나 죽는 것이 무섭다.
- 붉은 수금, 쓰하라 야스미, 권영주 옮김, 시작, 2009





눈 아래 저 멀리로는 우울한 안개에 싸인 허드슨 강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강 위로 흰 돛을 단 돛단배 한 척이 미끄러지듯 나타났고 평화로워 보이는 증기선 한 척이 천천히 상류로 올라가고 있었다.
- X의 비극, 엘러리 퀸, 서계인 옮김, 시공사, 1994





일본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우리 할아버지는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부터 대대손손 내려오던 우리 가문의 신분을 잃고 고작 밭 한 뙈기로 삶을 연명해야 했다고 한다.
-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 이만교, 문학동네, 2001





나이가 지긋한 이 두 노인은 버켓 씨의 부모님이다. 할아버지 이름이 조이고, 할머니 이름은 조세핀이다.
- 찰리와 초콜릿 공장, 로알드 달, 지혜연 옮김, 시공주니어, 2001





와인도 말을 한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길모퉁이에 앉은 점쟁이, 결혼 피로연의 불청객, 거룩한 바보에게 말을 건네보라. 그것은 말을 한다. 복화술을 한다. 와인에게는 백만 가지의 목소리가 있다. 와인은 혀를 풀어놓아 결코 말하고 싶지 않았던 비밀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비밀을 털어놓게 만든다. 와인은 외치고 고함치고 속삭이게 만든다. 위대한 것들을 말하고, 근사한 계획과 슬픈 사랑과 처절한 배신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깔깔대며 비명을 지른다. 혼자 나직이 키득댄다. 혼자마의 감상에 젖어 훌쩍거린다. 오래 전의 여름날과 까맣게 잊혀진 기억들을 펼친다. 한 병, 한 병, 다른 시간, 다른 장소의 향기를 풍긴다. 흔하기 짝이 없는 리브프라우밀히에서부터 거만한 1945년산 뵈브 클리코에 이르기까지 모든 와인은 하나의 작은 기적이다. '일상의 마법'이다. 조는 그렇게 불렀다. 보잘것없는 물질이 꿈을 빚어내는 재료로 변하는 것.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연금술.
- 블랙베리 와인, 조안 해리스, 송은경 옮김, 문학동네, 2006





바다로 이어지는 길은 하얗게 빛나고 있다.
- 검은 빛, 미우라 시온, 이영미 옮김, 은행나무, 2009





그 사내를 봤을 때 나는 파이를 다 먹고 커피를 두 잔째 마시고 있었다. 자정 화물 열차는 몇 분 전에 도착했고, 사내는 터미널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있는 레스토랑 창문 한 귀퉁이에서 눈에 손을 올리고 불빛에 껌벅거리면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자신을 보고 있은 걸 알아차리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거 여전히 거기 있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놈팡이들은 항상 나를 만만하게 봤다.
- 내 안의 살인마, 짐 톰슨, 박산호 옮김, 황금가지, 2009
by delius | 2010/12/18 12:52 | underline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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