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첫 문단 (2)
마이어 랜즈먼이 자멘호프 호텔에 투숙한 지도 어느덧 9개월이 다 되었다. 용케도 그동안은 이 호텔 투숙객 중 누구도 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누군가가 208호 투숙객, 자칭 에마뉴엘 래스커라는 유대인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 놓은 것이다.
- 유대인 경찰연합, 마이클 셰이본, 김효설 옮김, 중앙북스, 2009





1863년 5월 24일 일요일, 나의 삼촌인 리덴브로크 교수는 함부르크의 옛 시가지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동네인 쾨니히 가 19번지에 있는 작은 집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 지구속 여행, 쥘 베른, 김석희 옮김, 열림원, 2002




볼수록 신기한 광경이다. 이곳 4층 베란다에서는 고슈 가도(甲州街道)가 눈앞에 내려다보이는데, 하루에 몇 천 대나 되는 차들이 지나다니지만 사고를 일으키는 차는 한 대도 없다. 베란다 바로 밑에 횡단보도가 있는데,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면 달려오던 차들은 어김없이 정지선에 멈춘다. 그 뒤로 달려오던 차도 앞차와 거리를 두고 부딪치지 않을 정도의 위치에, 또 그 뒤에 오는 차도 같은 간격을 두고 멈춘다. 그리고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면 첫 번째 선두 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고 두 번째, 세 번째 차도 안전한 간격을 두고 이끌려가듯 뒤를 잇는다.
- 퍼레이드, 요시다 슈이치, 권남희 옮김, 은행나무, 2008




얼어붙을 듯 춥다. 여느 때와 다르게 영하 18도다. 그리고 눈이 내리고 있다. 더이상 내 모국어라 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자면, 이 눈은 카니크다. 커다랗고, 거의 무게 없는 덩어리가 되어 내리는 결정체가 흰 서리로 부서져 땅을 한 켜 뒤덮고 있다.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박현주 옮김, 마음산책, 2005




육지에 오른 후에도 바다를 잊을 수 없다.
- 해협의 빛, 쓰지 히토나리, 양억관 옮김, 고려원, 1999




간밤에 눈이 또 내렸는지 댓돌 밑에까지 눈이 쌓였다. 햇빛에 마을은 온통 은백색으로 반짝이고 멀리 안산의 삼봉도 칼칼한 겨울하늘 아래 하얀 능선을 그리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이면 한산하지만 정초에 눈이 와서 인적이 끊긴 듯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아침 잠이 많은 단비도 창이 밝아 깨었는지 어느새 눈길을 내고 거위 사료를 주고 있었다.
- 가까운 골짜기, 강석경, 민음사, 1989




산케이엔(三溪園)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택지 북쪽 끝에는 14층짜리 아파트가 늘어서 있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인데도 거의 대부분 입주가 끝난 상태였다. 아파트 한 동마다 100여 세대나 모여 살고 있었지만 주민들은 옆집 사람 얼굴조차 알지 못했다. 각각의 집들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은 밤이 되면 켜지는 불빛밖에 없었다.
- 링, 스즈키 코지, 윤덕주 옮김, 씨엔씨미디어, 1999




그날 아침, 항구에 죽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수면 위로 둥둥 떠다니는 그것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뱃전을 따라 천천히 표류했다. 주둥아리 밖으로 썩은 생선 대가리가 삐죽 튀어나왔고, 그 생선 입에서 다시 3-4 센티 정도의 끊어진 낚싯줄이 나와 있었다. 나는, 그 생선 대가리는 낚시 미끼였고 고양이가 그걸 먹으려고 물위로 몸을 숙였다가 그만 낚싯바늘이 목구멍에 걸려 중심을 잃고 물에 빠진 거라 추정했다. 내가 서 있던 항구의 물은 매우 더러웠지만 양노래기나 숭어 떼가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고 밑바닥의 자갈과 해초 속에서는 창자가 터진 곰치 사체에 치어 떼가 우글우글 달려들고 있었다. 자리를 뜨기 전 나는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수면 위의 물결을 따라 아주 천천히 좌우로 혹은 상하로 항구를 표류하는 고양이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 망설임, 장-필립 뚜생, 이재룡 옮김, 고려원, 1994




별이 쓸리는 밤이었다. 바람이 꽤 세었다. 서북지방의 밤공기가 아직 찰대로 찬 삼월 중순께였다.
- 카인의 후예, 황순원, 문학과지성사, 1994




날은 아직 완전히 밝지 않았다. 도로변에 위치한 창고 곁에는 가지를 크게 벌린 커다란 목부용(木芙蓉)이 있다. 매년 여름이 다가오면 그 나무에 하얀 꽃이 피어, 낮이건 밤이건 그 주변에 오는 사람을 흰색과 향기로 물들였다. 인부들이 오더라도 수고를 덜 수 있도록 아키유키는 혼자 창고에서 작업 도구를 꺼내어 목부용 곁에 세워둔 덤프트럭에 실었다. 아키유키의 의붓형인 후미아키가 작업반을 지휘하고 있었다. 후미아키는 항상 "도구 준비는 인부들에게 시키면 돼" 하고 말했다. 그러나 후미아키가 "일당은 그래서 주는 거니까 인부들을 편하게 해줄 필요는 없어" 하고 말해도 아키유키는 남들보다 한 시간 가량 일찍 일어나 작업 도구를 점검하고 준비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아키유키는 곡괭이와 삽이 좋았다. 그것으로 땅을 일구고 흙을 퍼낸다. 인부들을 편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고정 멤버인 열명의 인부들에게 자신이 나누어준 작업 도구로 일을 시키는 것이 지금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의붓아버지인 시게조는 그러한 아키유키를 보고 "작업반을 맡으면 후미아키보다 훌륭한 감독이 될 거야" 하고 말했다.
- 고목탄, 나카야마 겐지, 허호 옮김, 문학동네, 2001




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그리스를 정복한 왕 중 왕 필립포스의 아들, 나는 화염으로 붉게 물든 어느 날 밤 이 세상에 왔다.
- 알렉산더의 연인, 샨사, 이상해 옮김, 현대문학, 2006




건초를 실은 트럭에서 쫓겨난 때는 정오경이었다. 그 전날 밤 국경선 아래쪽에서 트럭에 훌쩍 올라탔는데, 덮개 밑에 자리를 잡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티아 후아나에서 3주일이나 보낸 뒤라 잠이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엔진을 식히기 위해 트럭을 한쪽으로 세웠을 때도 나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한 쪽 발이 비쭉이 나온 것이 트럭 운전사 일행의 눈에 띄어, 그들이 나를 트럭 밖으로 던져 버린 것이었다. 객쩍은 소리를 늘어놓아 볼까 했지만, 내 전 재산이라야 무표정한 얼굴뿐이고 보니,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는다는 것은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얻는 담배 한 대를 들고, 뭘 좀 먹을까 해서 도로를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제임스 M. 케인, 공경희 옮김, 시공사, 1996




살아있음을 증오했던 것은 아닌데, 늘 꿈속처럼 생의 모든 장면이 멀고 뿌옇기만 했었다. 많은 것들을 아주 가깝게 느끼거나 부자연스럽게 멀리 느꼈다.
- 하치의 마지막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김난주 옮김, 민음사, 2003




들쥐 가족의 가장인 프리스비 부인은 피츠기번이라는 한 농부의 채소밭에 있는 지하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집은 겨울철에 식량이 떨어지고 나무와 목초 사이에서 지내기가 힘들어지면 옮겨 오는 피신처였다. 사람들이 수확을 끝낸 후에는 콩, 감자, 완두콩, 아스파라거스 조각 등 쥐들에게 돌아올 식량이 많이 있었다.
- 니임의 비밀, 로버트 오브라이언, 임석규 옮김, 김영사, 1993




오전 10시 30분 정각에 제임스 엑커트는 리버오크 대학 구내의 스토더드 홀 앞에 차를 세웠다. 그로트월드 웨이너 핸센의 연구실은 이 건물 안에 있었다. 그러나 앤지 훠랠은 건물 모퉁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전혀 의외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 드래곤과 조지, 고든 R. 딕슨, 강수백 옮김, 시공사, 1999




'참을성 없이' 내뱉은 단 한마디의 말이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이토록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 감정의 모험, 아흐멧 알탄, 이난아 옮김, 황매, 2004




조지 채프먼한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5월 둘째 주 화요일이었다. 그는 변호사인 브라이언 콘티니한테 내 이름을 들었다면서, 사건을 맡기고 싶은데 시간 여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아마 시간이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지난 보름 동안 열아홉 살짜리 부잣집 딸을 찾아다니며 지긋지긋한 시간을 보낸 뒤끝이어서, 지금으로서는 새 고객이 전혀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수십 차례나 막다른 골목에 부닥친 끝에 마침내 보스턴 윤락가에서 매춘부로 일하고 있는 그 아가씨를 찾아냈는데, 그녀가 내게 던진 말이 고작 이랬다.
- 스퀴즈 플레이, 폴 오스터,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2000




기묘한 남자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 음양사, 유메마쿠라 바쿠, 김소연 옮김, 손안의책, 2004
by delius | 2010/11/11 23:29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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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tarla at 2010/11/12 07:58
우악! 이거 무지 재미있습니다.
<스퀴즈 플레이>는 뒤가 너무 궁금하잖아요!!!
책을 못 찾겠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따라 해봐도 되나요? *_*
delius님 책장에서 무작위로 뽑아 보신 거죠?

참, 평소 궁금했던 질문도 하나.
delius님 아이디는 영국 작곡가 그 delius에서 따신 거예요?
Commented by 노란개구리 at 2010/11/12 08:24
마저 읽고싶어지게 만드는 절단신공이네요 ㅎㅎ 재미있네요^^ 저도 스퀴즈 플레이 뒷부분이 궁금합니다!!
Commented by delius at 2010/11/12 09:56
- starla님 : 네네 그냥 책장에서 뽑아서 너무 긴 문단은 빼고 ^^;;; starla님이 하신다면 기대기대~ / 홍홍 [스퀴즈 플레이] 바로 뒷문장은 욕이 나와요 -_-; / 네~ Delius의 [Florida Suite
] 중 "Daybreak"라는 곡을 듣고 넘 좋아서 닉네임으로 삼기로 했어요. 가끔 다시 들어도 두근두근~ 프로필 사진도 Delius님~
- 노란개구리님 : 앗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었어요! : )
Commented by starla at 2010/11/12 10:52
오, 역시... 프로필 사진이 delius 님인 줄은 이제야 알았네요.
전 delius님의 닉네임으로 먼저 친근해졌는데,
그래서인지 괜히 호감이 가더라고요. ㅎㅎㅎ
Commented by delius at 2010/11/12 21:32
- starla님 : 홍홍 계속 호감 갖고 봐주세요 ^_^)/ | 노란개구리님과 starla님을 위한 [스퀴즈 플레이]의 2번째 문단


"꺼져, 이 짭새야. 나는 엄마도 아빠도 없어. 알겠냐? 나는 지난주에 네가 어떤 끄나풀 새끼를 쥐어짜고 있을 때 태어났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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