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첫 문단
"완벽한 문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대학 시절 우연히 알게 된 어떤 작가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내가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인데, 적어도 그 말은 나에게 어떤 위로가 되어주었다. 완벽한 문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김난주 옮김, 열림원, 1996




쌍돛대 유람선 <넬리>호의 돛은 펄럭이지 않았고 배는 닻에 내린 채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멎었다. 조수는 이미 밀려들고 있었는데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다. 그래서 강 하류로 내려갈 예정이었던 배는 정박한 채 조수가 썰물로 바뀔 때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 암흑의 핵심, 조셉 콘래드, 이상옥 옮김, 민음사. 1998




언젠가 꽤 긴 시간 동안 당신이 시내 중심가의 극장 화장실에 갇히는 불운을 맛보게 된다면, 처음에는 절망감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물에 희석되고 나면 틀림없이 당신이 살아왔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당신의 일생에 극히 드물게 일어날 이런 기회를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마음의 명령을 따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살아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될 것이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폴리 델라노, 송병선 옮김, 책이있는마을, 2000




자 그럼, 다시 시내의 학교로 들어가 돈벌이에 나서볼까. 생활을 꾸려가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이 드는 건 아니지. 한달에 이백 달러 정도면 충분해. 하지만 지금은 수중에 돈이 다 떨어져가고 있고 누이한테 다시 손 벌릴 염치는 없어. 다행히도 학생들이 학기의 첫 리포트를 제출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어. 언제나 꾸준한 돈벌이가 되는 장사지. 데이비드 셀리그의 지치고 녹슬어가는 머리가 다시 한번 실력을 발휘할 때.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월의 아침에 나는 칠십오 달러 상당의 일을 잡아햐 해. 공기가 맑고 상쾌하군. 고기압 세력이 뉴욕을 덮고 있어서 습기와 안개라곤 찾아볼 수 없어. 이런 날씨라면 나의 시들어가던 힘도 다시 활개를 칠 테지. 그럼 아침의 기운이 하늘에 충만한 이때 너와 나 함께 출발해보는 거야. 브로드웨이-IRT 지하철을 향해. 표는 준비됐겠지?
- 다잉 인사이드, 로버트 실버버그, 장호연 옮김, 책세상, 2005




가장 좋아하는 꽃은 프리지어였다. 청결한 향이 난다고 생각한다. 도우코는 프리지어에 시호와 스톡을 곁들여 초록색이 풍성한 꽃다발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 장미 비파 레몬, 에쿠니 가오리, 김난주 옮김, 소담출판사. 2008




성에서 하룻저녁 하룻밤을 묵고픈 욕구가 우리를 사로 잡았다. 많은 성들이, 프랑스에서는, 호텔이 되었다. 푸르름 없는 추함의 광막함 속에 한 조각 사각의 푸르름, 광대한 도로망 속의 한 조각 오솔길, 나무들, 새들. 나는 자동차를 몰고 있고, 백미러를 통해 내 뒤의 자동차를 관찰한다. 왼쪽의 작은 등이 깜빡거리고 있으며 자동차 전체가 조바심의 전파를 보내고 있다. 저 운전수는 나를 추월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맹금이 참새를 노리듯이 그 순간을 노리고 있다.
- 느림, 밀란 쿤데라, 김병욱 옮김, 민음사, 1995




당신 앞에 서면, 언제나 묘하게 불편합니다. 미용실에서 점원이 머리를 감겨줄 때마다 물의 온도를 가지고 불평을 하는 나에게 친구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이곤 해요. "이제 좀 그만 좀 해라"라는 핀잔을 들을 만큼.
- 에밀리, 타케모노 노바라, 기린 옮김, 두드림, 2005




사람들이 아주 다른 말을 쓰던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 따뜻한 나라들에는 크고 화려한 도시들이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는 왕이 사는 궁전이 우뚝 서 있고, 넓은 도로와 좁은 길과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있었다. 황금과 대리석으로 조각된 신의 상이 서 있는 웅장한 사원도 있고, 세계 곳곳의 왕국에서 들여온 온갖 다채로운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시장도 있었으며, 사람들이 새로운 일을 이야기하고, 연설을 하거나 듣기 위해 모였던 넓고 아름다운 광장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에는 극장이 있었다.
- 모모, 미하엘 엔데, 한미희 옮김, 비룡소, 1999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김경은 옮김, 두레, 2002




레이첼 린드 부인은 에이번리 마을의 큰길이 작은 골짜기 속으로 비탈져 내려가는 큰길 가에 살고 있다. 이 큰길을 따라 금낭화와 오리나무가 늘어서 있고, 멀리 커스버트네 숲 속에서 흘러나오는 시내가 이 길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 시내는 상류에서는 은밀한 신비의 샘과 작은 폭포를 이루며 꾸불꾸불 세차게 흐르지만, 린드 부인네 골짜기에 이르면 물길이 제대로 잡혀 졸졸 흐르는 작은 개울이 되었다. 아무리 시내라도 레이첼 린드 부인네 집 앞을 지날 때는 예의와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아니면 린드 부인이 창가에 앉아, 이를테면 시냇가에서 올라오는 아이들이라든가 집 앞을 지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꼼꼼히 살피고 색다르거나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을 보면 그 까닭은 확실하게 알아낼 때까지 가만 있지 않으리란 점을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 빨간 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김경미 옮김, 시공주니어, 2002




끝이 시작되고 있었다. 영겁만큼이나 길게 느껴진 시간이 흐른 후에.
- 앰버 연대기-1 앰버의 아홉 왕자, 로저 젤라즈니, 김상훈 옮김, 예문, 1999




지금까지 나는 이 이야기를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고, 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남들이 믿지 않을까봐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게다가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얘기해 버리면 나 자신도 이야기 자체도 아주 값싼 것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여름 캠프에서 소등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에 교사가 들려주는 귀신 이야기보다 나을 게 전혀 없는, 아주 시시한 이야기가 되어 버릴 것이라고. 내 입으로 말하고 그것을 내 귀로 듣게 되면 나 자신마저도 믿지 않게 되고 말것도 같았다.
- 총알차 타기, 스티븐 킹, 최수민 옮김, 문학세계사, 2001




내 나이 열다섯이던 해에 나는 간염에 걸렸다. 나의 병은 그해 가을에 시작되어 다음 해 봄에 끝났다. 묵은해의 날이 점점 더 추워지고 어두워질수록 나의 몸은 자꾸만 약해져갔다. 새해가 되면서 비로소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1월은 따뜻했고, 어머니는 나를 위해 침대를 발코니에 내다주었다. 하늘과 태양과 구름을 바라보고 있으면 뜰에서 노는 아이들 소리가 들려왔다. 2월의 어느 초저녁에는 지빠귀 노랫소리도 들렸다.
- 더 리더, 베른하르트 슐링크, 김재혁 옮김, 이레, 2004




1965년 7월, 나는 새로 산 샌들을 신고, 인생에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숨어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곧 내 남편이 될 윌리엄을 만났다. 그때 우리는 54번가와 6번가가 마주치는 길모퉁이에서 문독과 말을 나누고 있었다. 초저녁이었다. 하늘은 환히 빛나고 있었다. 갓 스물이었던 나는 알려진 세계의 아름다움에 아직도 쉽사리 그리고 자주 깜짝 놀라곤 했다. 가죽 헬멧을 쓴 문독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땀방울이 반짝반짝 빛났다.
- 세월의 계단, 제인 샤피로, 김석희 옮김, 동문사, 1992




불태우는 일은 즐겁다.
- 화씨 451, 래이 브래드버리, 강창래 옮김, 성무, 1992
by delius | 2010/07/24 12:13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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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당고 at 2010/07/25 23:07
오와- 이렇게 모아놓으니 정말, 공부가 되겠는걸요 ㅋ
Commented by delius at 2010/07/26 07:35
- 당고님 : 이렇게 적다 보니 작가마다 특징이 조금씩 보이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Commented by iisland at 2010/07/27 00:06
스티븐 킹, 정말 스티븐 킹 같은 시작이네요! 그냥 스티븐 킹이군! 이 소리가 딱 나오는 구절 같아요. 특히 "내 입으로 말하고 그것을 내 귀로 듣게 되면 나 자신마저도 믿지 않게 되고 말것도 같았다." 여기서 너 스티븐킹이냐!? 자동질문..ㅋ
Commented by delius at 2010/07/27 00:07
- iisland님 : ㅋㅋ 네~ 막 다음이 궁금해지는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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