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돈이 권력을 사는 체제
[스노볼]을 읽다보면 밑줄 그을 만한 부분이 끊임없이 이어 나오지만, 예전에 증여세나 상속세를 왜 내야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말문이 막힌 기억이 떠올라 그 부분을 버핏의 관점에서 설명한 대목을 옮겨봅니다. 물론 미국의 연방 유산세와 우리의 상속세가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 배경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어요.(진하게는 제가 한 것입니다.)


... 버핏의 정의감은 부시 대통령의 새로은 예산안의 핵심적인 사항이라고 꼽을 수 있는 어떤 계획안을 보고 활활 타올랐다.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던 연방 유산세를 점차 폐지해 나간다는 계획이었다. 한 사람의 사망에 대해서 세금을 매길 수 없다는 게 폐지하자는 쪽의 논리였다. 그래서 유산세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산세를 듣기도 섬뜩하게 '사망세'라고 불렀다. 죽음에 세금을 물리는 게 어디 있는냐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유산세가 열심히 일하려는 기업가의 열망을 꺾어 놓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장이 죽은 뒤에 세금을 내기 위해서 가족 농장을 팔아야만 하는 어떤 가정을 예로 들었다. 물론 그런 사례가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수가 겪는 고통보다는 이 세금을 거둘 때 누릴 수 있는 효과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버핏은 주장했다.
  유산세는 실제로 사망세가 아니었다. 일종의 증여세였다. 어떤 사람이 일정 기준이 넘는 돈을 누구에게 증여할 때면 증여세를 냈다. 모든 증여세는, 19세기 후반에 유산과 증여로 막대한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이를 이용해서 국가 정치를 주무르는 일을 막으려는, 다시 말해서 금권 정치를 방지하고자 도입된 장치였다. 하지만 유산세는 살아 있는 사람 사이의 증여 행위에 따른 증여세보다 세금 징수 효과가 낮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훨씬 규모가 큰 사후 증여금에 세금이 매겨지지 않았다. 버핏은 자기 명성에서 비롯된 힘을 이용해, 해마다 미국에서 발생하는 사망자 약 230만 명 가운데 약 2퍼센트인 5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사람만이 유산세를 납부하며 총 납부되는 유산세 가운데 절반은 겨우 4천 명도 안되는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런 사람들은 걸프스트림 4를 가지고 있고, 새로운 모델이 나올 때마다 마이바흐를 사며, 프랑스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고, 또 온갖 보석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렁주렁 달고 다닐 수 있는 엄청나고도 엄청난 부자들이었다. 이런 부자들만이 그 4천 명 안에 들 수 있었다.
  자기 돈을 누구에게 거저 주든 뇌물로 주든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반박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부자가 된 것은 사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일정한 부분은 사회에 빚을 진 셈이다. 만일 이 사람들이 순전히 자기 힘만으로 그런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고 생각한다면, 말리에서 굶주리는 어머니 슬하의 다섯 아이들 가운데 한 명으로 환생해서 코트디부아르에 있는 코코아 농장에서 노예로 일한 다음에 얼마나 부자가 될지 두고 볼 일이다, 라고.
  만일 유산세가 폐지된다면, 정부가 살림을 꾸리려면 여전히 같은 규모의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자들이 유산세로 납부하는 금액만큼을 다른 사람들이 채워 넣어야 한다고 버핏은 말했다.
  오랜 세월 동안 공급자 중심의 이론은 세금을 줄이면 거기에 따라서 정부의 지출도 줄어들 것이라는 논리를 당연한 사실처럼 여겼다. 이런 입장은 개인이나 가정이 자기 수입에 맞춰서 살듯 정부도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식의 직관적인 논리였다.(물론 2002년까지 일반 서민은 자기 수입에 맞춰 살지 않으려고, 인위적으로 낮게 설정된 금리를 바탕으로 한 주택 담보의 융통 범위 안에서 돈을 끌어다 썼지만.) 공급자 중심의 정책에 대한 논의는 2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뜨거웠다.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금만으로는 보통 예산을 대기가 부족했다. 그래서 그 차액만틈 빌려야 했다. 그런데 이 이론이 이제는 더욱 미심쩍게 보였다. 유산세를 폐지한다는 것은 다른 세금을 올리거나 더 많은 돈을 빌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부채에 대한 이자 및 원금 상환의 부담은 궁극적으로 보다 많은 세금으로 국민 개개인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유산세의 단계적인 폐지라는 제안은 위선의 극치라고 생각했다.
  만일 유산세가 폐지되면 이런 높은 세금을 납부하는 평균적인 사람들은 다시는 유산세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유산세를 폐지하자는 압박은 오클라호마에 작은 농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게 아니었다. 전체 인구의 극소수에 속한 사람들, 맨해튼의 3층짜리 펜트하우스를 가지고 있으며, 디어 밸리 Deer Valley에 침실이 아홉 개나 되는 오두막 별장을 가지고 있으며, 난투켓에 여름 별장을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코스타리카에도 콘도를 가지고 있는 엄청난 부자들, 보통 엄청나게 짧은 기간에 재산을 모은 졸부들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버핏은 말했다. 버핏은, 정치는 워싱턴 정가 출신의 로비스트들을 고용해서 의원들의 귀를 장악하고 정치 헌금을 주고 뒷거래를 하는 사람들이 장악해 버렸다고 말했다. 버핏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 심지어 버핏은 끊임없이 정치 자금을 모아야 하는 굴레에 매인 정치가들을 동정하기 까지 했다. 버핏이 비판하고 경멸한 대상은 돈이 권력을 사는 체제 그 자체였다. ...



[스노볼] 2권 '56. 부자에 의한, 부자를 위한'(오마하, 2001.7~2002.7) 중에서, 앨리스 슈뢰더, 이경식 옮김, 랜덤하우스, 2009




p.s. 그나저나 옮겨적으면서 다시 찬찬히 보니 위의 이야기는 먼나라 이야기로만 보이지는 않네요. 버핏도 "열심히 일하려는 기업가의 열망을 꺾어 놓는" 세금을 지지하니 어떤 사람들 기준으로 보면 좌파일듯...(퍽)
by delius | 2009/12/12 10:02 | underline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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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9/12/12 22:4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delius at 2009/12/13 19:25
- 비공개님 : "나도 코코아 농장에서 일해봤는데..."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잠깐 생각했어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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