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하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도 인간이란 자기 멋대로 사니까
  "그런 얘기야. 아무도 범인을 잡으려 하지 않고 살인이든 도둑질이든 제 하고픈 대로 하게 놔두는 세상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냐. 폭력이든 권력이든 힘이 판치는 세상이 되겠지. 실제로 그런 시대가 있었고 그런 국가가 지금도 존재하기도 한다만. 글쎄, 가치관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지. 하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도 인간이란 자기 멋대로 사니까……. 그러니까 음, 이건 내 마음의 문제야. 난, 굳이 말하자면 약한 녀석이 강한 녀석한테 괴롭힘당하지 않고 둘 다 태평스레 사는 사회가 좋아. 그런 사회가 싫다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 사람보고 참아달라고 얘기하고 싶어. 모두가 조금씩 참으며 살아가니까. 폭력적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걸 자제시키고, 권력을 쥔 사람에게 권력으로 짓누르는 걸 억제시키면서 말이야. 네가 든 예세서도, 그 아이의 부모님도 아픔이 아프겠지만 그 괴로움을 참아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어. 이건 사회질서의 문제이기도 하고 내 마음의 문제이기도 해."
  아빠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음 얘기를 더 하자면 살해당한 사람의 마음도 있다. 살해당한 사람이 과연 죽고 싶었을까. 음, 살해당한 사람이 자신과 가깝다면, 예컨대 네가 불합리하게 살해됐다면, 난 네가 '죽고 싶지 않았다'라는 마음을 대변해주고 싶을 거다. 굳이 어럽게 생각할 거 없다."
  아빠는 그걸로 끝이라는 듯 고개를 한 번 주억거리고는 남은 엽차를 후루룩 마셨다 나는 턱을 괸 채 아빠의 연설을 들으면서 여하튼 건실한 의견이네, 하고 꽤 감탄했다. 주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빠의 20년 경찰 생활은 허투루 한 게 아닌 모양이다. ...



[나와 우리의 여름], 히구치 유스케, 이기웅 옮김, 시작, 2008




전체적으로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귀엽고 발랄하고, 주인공 캐릭터도 재치있어 마음에 들고, 문체도 산뜻하고, 의문의 자살사건을 좇는 이야기적 재미 요소도 충분한, 한마디로 빼어난 작품입니다. 이혼한 형사 아버지와 함께 사는 고등학생 슌이치가 야쿠자 두목의 딸인 아사코와 함께 같은 반 아이의 자살에 숨겨진 진상을 찾는 이야기로 간단히 요약되는데, 싱그러운 청춘들의 연애와 자살, 살인, 음모라는 어두운 요소가 생각외로 잘 어울리면서 300쪽 남짓한 소설을 단숨에 읽게 만들었습니다. 1988년 발간되었으니 20년이 지났는데,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것이 미스터리의 고전에 올려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네요. 거기에 데뷔작이라니 O.O 다른 히구치 유스케 작품도 곧 만나게 되길 기대해봅니다. 첫대목을 장식하는 "우리 집 정원을 보금자리 삼은 매미는, 매미인 주제에 여름을 싫어한다."는 문장을 보고 느낌이 오신다면 꼭 읽어보시라고 적극 추천하고 싶네요.




p.s. 핸드폰 없을 때는 어떻게 약속 잡고 연애하고 그랬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잘 하고 살았어요~ 하고 이야기 해주는 것 같아요. :-)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번역본 표지도 좋지만 원서표지 정말 멋지네요!
by delius | 2009/01/27 15:47 | underline | 트랙백 | 핑백(4)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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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D E L I U S.. at 2009/04/11 20:24

... 다만, 주인공이 고등학생인 것도 있고, 초기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고등학생들이 친구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푼다는 초반부 설정이 히구치 유스케의 [나와 우리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데, 비교를 하자면 [나와 우리의 여름]의 완승입니다.) 요즘 나오는 근작들만 보신 분이라면 풋풋하네 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좀 싱겁군 ... more

Linked at D E L I U S.. at 2009/07/14 01:21

... 회상 단편부분 수상작이라는 것이 눈에 띄어 읽기 시작했는데 수록된 단편 4편 모두 맘에 드는 멋진 소설집이었습니다. 첫번째 수록작품 "열여덟의 여름"은 히구치 유스케의 [나와 우리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는데 추리소설적인 면도 살리면서 얼굴에 웃음을 띄게 만드는 열여덞 주인공의 재치있는 대사와 생각들이 인상적이었어요. 2번째 작품 "자그마 ... more

Linked at D E L I U S.. at 2009/12/31 01:49

... 소설 [발간연도에 관계없이 읽은 시점 기준 - -;;.] 만화 포함 후보작 15권 - 개더링 - 경관의 피 -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 금단의 팬더 - 나와 우리의 여름 - 내 남자 - 다마모에 -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 목소리 - 보이A - 소녀 수집하는 노인 - 수도원의 죽음 - 어제 뭐 먹었어? - ... more

Linked at D E L I U S.. at 2011/09/23 11:49

... 예전에 읽은 [나와 우리의 여름]이 생각나서 이 작품이 받은 산토리미스터리대상 역대 수상작을 정리해봤습니다. 산토리미스터리대상[サントリーミステリー大賞]이란? 산토리, 문예춘추, 아 ... more

Commented by kainen at 2009/01/27 16:13
오- 좋네요. 읽어봐야겠어요.
Commented by delius at 2009/01/27 22:46
- kainen님 : 네~ 무척 좋아요 ^^)/
Commented by 크리스 at 2009/01/28 20:50
아유, 일본어판 표지 정말 이쁘네요.
Commented by delius at 2009/01/29 16:02
- 크리스님 : 그쵸 그쵸 ^^
Commented by 눈콩 at 2009/02/12 01:09
읽는 내내 유쾌했어요.
세상은 분업이란 게 있다며 여자 마음은 너에게 맡기마라는 말에 뒤집어졌어요. ^^ 이 글만 보고는 그래도 좀 듬직한 아버지인 줄 알았거든요.
덕분에 좋은 책 읽었어요. :)
Commented by delius at 2009/02/13 00:36
- 눈콩님 : 네~ 정말 유쾌한 작품 / ㅋㅋㅋ :-) 별말씀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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