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 | 토머스 H. 쿡
[책을 읽고 나서]


핸드폰도 없고 CSI도 없고, 피의자의 프로필도 네트워크로 검색이 되지 않고, 밤샘조사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1952년 뉴욕의 가을을 배경으로 어린아이를 살해한 용의자에 대한 심문이 시작됩니다. 결정적인 물증도 없고 살인목격자도 없어서 이제 12시간만 지나면 범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풀어줘야 합니다. 그 12시간 동안 마지막 승부라는 생각으로 용의자의 자백에 기대를 거는 형사들과 자신은 하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용의자 사이의 지리하면서도 긴장이 사그라들지 않는 전쟁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전쟁은 (책의 소제목이기도 한) "삶의 차가운 진실"에 조금씩 접근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두뇌플레이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살인이 감추고 있는 거대한 음모를 밝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누가 그 아이를 죽인걸까? 하는 고전적인 미스테리물의 훌륭한 한 예가 될 만큼 후반부의 결말과 사건의 재구성은 감탄스럽지만 소설이 지닌 분위기가 쓸쓸하면서도 애잔해서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마음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을 매력적이면서도 슬프게 만드는 다른 한 축은 크고 작은 조연들이 그려내는 그냥 지나치기에는 안쓰러운 이야기들인데, 죽어가는 마약중독자 아들로 괴로워하는 버크 반장이나 전쟁을 경험하면서 마음에 검은 얼룩이 새겨져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 전하기를 두려워하는 코언 형사, 그리고 4년 전 아이가 살해당한 이후 아내도 세상을 뜨고 단단하게 응어리진 슬픔을 안고 사는 살아가는 피어스 형사... 그리고 다른 등장인물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읽는 이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면서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게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토머스 H. 쿡 작품 중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 같은데 출간 예정되어 있는 다른 작품도 빨리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래는 자신도 아이를 잃은 경험이 있는 피어스 형사가 피해자의 집에 방문해서 죽은 아이(캐시)의 옷장을 보고 생각에 잠기는 부분입니다. 다른 인상적인 구절도 많지만 소설의 쓸쓸한 분위기를 잘 나타내는 것 같아 옮겨 적어봅니다.


... 피어스는 아이의 옷이 걸려 있는 벽장을 바라보았다. 놀이 옷, 교회 옷, 앞으로 다가올 계절에 입으려고 챙겨둔 철 지난 옷이 생기 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자 캐시가 결코 입지 못할 졸업 가운과 웨딩드레스가 불현듯 떠올랐다. 아이가 이 세상을 떠난 순간 그 모든 찬란한 미래 역시 사라진 것이다. 아이는 두 번 다시는 빗방울도, 햇살도, 따뜻한 여름 바람도 느끼지 못할 것이고, 어여쁜 미소를 지어 누군가의 마음을 밝히거나 평범한 날을 축복으로 바꾸는 마술도 부리지 못할 것이었다. 아이는 침대 옆에 놓아둔 자그마한 플라스틱 나팔을 다시는 불지 못할 것이고, 책상 위의 장난감 타자기를 다시는 두드리지 못할 것이고, 바닥에 놓인 인형의 집 가구들을 다시는 이리저리 옮겨놓지 못할 것이다. 아이는 엄마나 남편이나 미래에 낳은 아이에게 결코 "사랑해"라고 속삭이지는 못할 것이다. 한때 살아 있었던 귀여운 소녀의 소리와 감촉과 몸짓이 모조리 침묵 속에서 뻣뻣이 굳어 이제는 썩어갈 일만 남은 것이다. ...


[서지정보]


제목 : 심문
원제 : The Interrogation (2002)
지은이 : 토머스 H. 쿡 Thomas H. Cook
옮긴이 : 김시현
출판사 : 시작
발간일 : 2008년 07월
분량 : 355쪽
값 : 11,000원




p.s. 만약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흑백영화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그리고 스페인어 번역본 표지.
by delius | 2008/11/29 09:32 | book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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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crobat at 2008/11/29 10:16
저도 아직 쿡의 작품은 이것밖에 읽지 못해서 뭐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심문>은 조만간 소개될 쿡의 대표작들과는 사뭇 이질적이라고 하더라고요. 괜찮은 독서이기는 했지만 이 작품을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었는데, 과연 다른 작품들은 어떨런지요. 이거 나온다고 하는 작품들이 계속 미뤄지는 걸 보면 좀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쿡의 미들네임이 Harris라네요. 비슷한 이름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먼저 데뷔했으니, 약자로 표시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을까요?
Commented by delius at 2008/11/29 10:28
- acrobat 님 : 이 작품이 이질적이라니 어떤 작품일지 더 궁금해지네요. http://vinbaker.egloos.com/3054752 블로그의 호평을 보고 여러가지로 상상을 하며 기대했는데, 근간목록의 마지막에 있어서 언제 나올지.... ㅜㅜ / 오 그렇군요. 연예인들이 동명이인이 있으면 예명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acrobat at 2008/11/29 10:49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읽은 적이 있네요. 정말로 대단한 단편이에요.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쿡의 작품으로 계간 미스터리 2006년 겨울호에 실려있는데, 이건 일부러 찾아서라도 읽을 가치가 있어요.


보통 쿡의 대표작들은 <Mortal Memory>, <Breakheart Hill>, <The Chatham School Affair>, <Instruments of Night> 정도라고 하는데, 아마 출판사는 달라도 모두 국내 판권 계약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가 벌써 1년이 훌쩍 넘어가는데, <심문>은 소리소문없이 덜썩 나와버려 좀 놀라기도 했어요.
Commented by delius at 2008/11/29 14:35
- acrobat님 : 와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찾아봐야갰습니다! / 오! 다 판권계약이 되어있다니... 언젠가는 나오는군요 : )
Commented by Mars from at 2008/12/01 20:53
Thanks for great post !

Commented by acrobat at 2008/12/01 21:48
오늘 서점에 가보니 <Instruments of Night>가 출간되었더군요. 인터넷 서점에 서지정보가 아직 안 뜬 것을 보면 오늘 나온 것 같아요. 제목이 살짝 노곤노곤한 것으로 바뀌었던데, 기억이 잘...-_-a
Commented by keachel at 2008/12/02 01:52
저도 괜찮게 읽은 소설입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것도 있지만. 문체에서 느껴지는 잔잔한 물결같은 느낌이 좋더군요.. 것보다 주인공이 중년이라는것에 한표를.. (음?!)
Commented by delius at 2008/12/02 10:29
- Mars from '" *_*
- acrobat님 : 찾아보니 "밤의 기억들"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네요~ 정보 ㄳㄳ
- keachel님 : 네 저도요~ / 홍홍 중년형사/탐정들의 인기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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