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서]
나이탓인지 편협한 독서습관때문이지는 모르겠지만 두꺼운 소설을 딱 보면 흥미나 호기심을 떠나서 단지 두께 때문에 읽을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습니다. 두꺼운 소설일수록 등장인물이 많고 사건이 복잡할 것은 뻔한데 점점 그것을 따라가는 일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지만 [살인의 역사] 같은 좋은 추리소설 - 추리소설로 분류해도 될까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 을 읽고 나면 읽기를 잘했다며 슬쩍 스스로를 칭찬하게 됩니다. ^^ 500페이지가 넘지 않는 소설이지만 처음에 등장하는 사건이 3건. 제1장부터 3장까지가 사건기록입니다. 각각 1970년에 있었던 어린이 실종 사건, 1994년 있었던 정체모를 이에게 딸을 살해당한 아버지 이야기, 1979년 있었던 남편을 도끼로 살해한 아내 이야기. 사건에 대한 건조하면서도 극적인 묘사가 끝나고나서는 사설탐정 주인공 잭슨 브로디와 이 세 사건의 인물들이 번갈아 등장하는 장이 계속 이어지다가 잭슨의 어릴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 하나 더 나오고 나서 각 사건들의 진실이 하나씩 드러납니다. 엄청난 진실이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꽤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사건들의 숨겨진 이면이 후반부의 쌍을 이루는 사건기록 장들과 맞물리면서 소설은 조용히 끝을 맺습니다. 해피엔딩이라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뭔가 찜찜한 것도 아닌... 어찌보면 편리하면서도 어찌보면 그것이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결말입니다.
잭슨 브로디 탐정은 최근 추리소설 속의 탐정이 그렇듯이 전직 경찰에 이혼당하고 딸아이도 겨우 접견하면서 상사인지 부하인지 모를 비서(이런 비서 캐릭터 맘에 들어요 ^^)에게 의지하면서 사건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만 맡고 지내는 중년입니다. 물론 집안청소는 잘 안하고, 건강도 썩 좋은 편은 아니구요. 이런 전형적인 캐릭터에게 기대하는 것들,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을 잭슨 탐정은 거의 대부분 보여주고 있는데 소설의 묘사방식 탓인지 묘하게도 딱히 영화의 한장면으로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점은 소설 전체의 분위기와도 일치하는데 굳이 영상화 한다면 몇부작의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소설은 호흡이 길다는 느낌입니다.(군데 군데의 묘사가 군더더기가 없음에도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이 독특합니다.) 소설을 읽다가 잠깐씩 먹먹해지는 부분들이 꽤 있어서 빠른 편집의 영상보다는 롱테이크의 여운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옮긴이는 "
이 작품을 두고 스릴러이니 심리 소설이니 의견이 분분한 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남은 자들이 겪는 고통이 섬세하고 리얼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부분이 이 작품을 여타의 스릴러나 범죄 소설과 구별 짓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독자는 가슴 밑바닥을 애잔하게 적시는 슬픔과 연민을 간직한 채 긴장감 넘치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고 적확하게 이 소설의 인상을 잘 정리하고 있는데 그런면에서 이 작품은 추리소설 팬들이나 그냥 일반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같은 이유로 둘 다에게 외면 받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만족감을 느끼며 찬사를 보내는 쪽에 서 있겠습니다.
[서지정보]
제목 : 살인의 역사
원제 : Case Histories (2004)
지은이 : 케이트 앳킨슨 Kate Atkinson
옮긴이 : 임정희
출판사 : 노블마인
발간일 : 2007년 11월
분량 : 460쪽
값 : 12,000원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저는 2번째와 마지막 원서표지가 제일 맘에 드네요.
p.s. 추가 2011년 BBC에서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졌어요~ 홍홍:
Case Hist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