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없다, 없다의 행렬
  ... 편의점을 뒤로하고 하숙으로 돌아온 나는 인스턴트 수프를 홀짝인 다음 이부자리로 들어갔다. 이부자리 안의 어둠을 향해 기침을 하고 "기침을 해도 혼자"라고 중얼거려보았다.
  약해진 몸으로 이 생각 저 생각 옮겨 다녀봤자 제대로 된 생각이 날 리 없었다.
  입학 이후 결코 올라간 적 없고 앞으로도 전혀 올라갈 기미가 없는 학업 성적. 취직 활동은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구실을 높이 내건 채 뒤로 미룰 뿐. 융통성도 없다. 재능도 없다. 저축한 돈도 없다. 완력도 없다. 근성도 없다. 카리스마도 없다. 사랑스러워 뺨을 갖다 비비고 싶어지는 새끼 돼지 같은 귀여움도 없다. 이렇게 '없다, 없다의 행렬'이 이어져서는 도저히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나는 너무 초조한 나머지 이부자리에서 기어 나와 한동안 두 평 남짓한 방 안을 탁탁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돌아다니면서, 어디 귀중한 재능이 굴러다니지나 않나 살폈다. 그러다 문득 1학년 때 '능력 있는 매는 발톱을 숨긴다'는 말을 믿고 '재능의 저금통'을 옷장 속에 숨겼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래. 그게 있었어! 오오, 그거야!"하고 나는 신이 났다.
  옷장을 열자 온통 웃자란 버섯투성이었다. 나는 '언제 이런 꼴이 됐지?'하고 얼굴을 찌푸리며 미끈거리는 버섯을 밀어제첬다. 그 속에서 꺼낸 '재능의 저금통'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마치 내 미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나는 저금통을 거꾸로 들고 미친 듯이 흔들어보았지만 나온 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거기에는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꾸준히'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만 이부자리에 쓰러져 울음을 터뜨렸다. ...



"나쁜 감기 사랑 감기"중에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모리미 토미히코, 서혜영 옮김, 작가정신, 2008




옮겨적으면서도 방을 두드리며 재능을 찾는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면서 킥킥거렸습니다. 원래 저는 이 소설처럼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애매한 설정과 애매한 주인공들이 나오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지 못하는 편이지만 이 소설은 읽는 내내 즐겁더라구요. 옮긴이의 말에 있는 기타무라 가오루의 소설평으로 개인적인 느낌을 대신합니다. 일본의 문학상 심사위원들은 느낌을 딱 잘 잡아서 표현해 주네요. :-)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작품을 앞에 두고 이것저것 단어를 늘어놓는 것이 공허해진다. 그냥 '읽어봐'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무책임한 의무의 방기가 아니다. 손끝에 닿는 기묘한 감촉, 혹은 이 혀끝의 촉감을 직접 맛보게 하고 싶은 것이다.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내 쪽에서 "어때? 어때?" 하고 빙긋이 웃으며 물어보고 싶어진다."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둘다 맘에 드네요. 만화판 표지는 여기서~
by delius | 2008/11/12 00:40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4)
트랙백 주소 : http://delius.egloos.com/tb/397646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at 2008/11/14 15:1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delius at 2008/11/15 23:11
- 비공개님 : 기억합니다. : ) / 네~ : )
Commented by 배시시 at 2008/11/16 13:26
밑줄도 그렇고 서평도 그렇고 왠지 씨~익 미소 지으며 볼 수 있는 소설이 아닐까 하는 느낌의 작품. 담아놔야겠음. ^^
Commented by delius at 2008/11/16 18:19
- 배시시님 : 네~ 말씀하신 대로의 느낌 ^^. 재미있어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 다음 >>



카테고리
전체
book
biography
obituary
music
entertainment
movie
internet
tour
underline
mistyped
photo
talk
publishing
press
exhibition
bonus
최근 등록된 덧글
안녕하세요 .. 시간이 ..
by at 08/05
지식이 짧아서 잘 모르..
by 골룸 at 05/08
Rorex가 아닌 Rolex로..
by ㅇㅇ at 06/30
파리여행을 끝으로 올라..
by purejoy at 11/26
- 이요님: 네 신기한 소..
by delius at 08/31
두번째 중세박물관의 그..
by 이요 at 08/30
- 카이토님 : 감사합니다..
by delius at 07/29
오~ 감사합니다 딱 이렇..
by 카이토 at 07/25
- 잘나가는 꼬마사자님:..
by delius at 07/19
저거 콩시에르 쥬리였군..
by 잘나가는 꼬마사자 at 07/18
메모장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합니다.

최근 등록된 트랙백
오즈 그레이트 앤드 파워풀
by 잠보니스틱스
이전블로그
2013년 09월
2013년 08월
2013년 07월
2013년 06월
2013년 05월
2013년 01월
2012년 12월
2012년 11월
2012년 10월
2012년 09월
2012년 08월
2012년 07월
2012년 06월
2012년 05월
2012년 04월
2012년 03월
2012년 02월
2012년 01월
2011년 12월
2011년 11월
2011년 10월
2011년 09월
2011년 08월
2011년 07월
2011년 06월
2011년 05월
2011년 04월
2011년 03월
2011년 02월
2011년 01월
2010년 12월
2010년 11월
2010년 10월
2010년 09월
2010년 08월
2010년 07월
2010년 06월
2010년 05월
2010년 04월
2010년 03월
2010년 02월
2010년 01월
2009년 12월
2009년 11월
2009년 10월
2009년 09월
2009년 08월
2009년 07월
2009년 06월
2009년 05월
2009년 04월
2009년 03월
2009년 02월
2009년 01월
2008년 12월
2008년 11월
2008년 10월
2008년 09월
2008년 08월
2008년 07월
2008년 06월
2008년 05월
2008년 04월
2008년 03월
2008년 02월
2008년 01월
2007년 12월
2007년 11월
2007년 10월
2007년 09월
2007년 08월
2007년 07월
2007년 06월
2007년 05월
2007년 04월
2007년 03월
2007년 02월
2007년 01월
2006년 12월
2006년 11월
2006년 10월
2006년 09월
2006년 08월
2006년 07월
2006년 06월
2006년 05월
2006년 04월
2006년 03월
2006년 02월
2006년 01월
2005년 12월
2005년 11월
2005년 10월
2005년 09월
2005년 08월
2005년 07월
2005년 06월
2005년 05월
2005년 04월
2005년 03월
2005년 02월
2005년 01월
2004년 12월
2004년 11월
2004년 10월
2004년 09월
2004년 08월
2004년 07월
이글루링크
erehwon.LAB
修身齊家萬事成
여성주의 코칭 발전소!
평범한 블로그
GROOVY FREAK
[SCENE-N-MIND]
log
SabBatH
까모의 룰루랄라~
잠보니스틱스
鐵木居士의 月印千江
河伊兒의 고물상
대답이 있다.그냥 시체는..
Extey Style
그냥그냥
들풀.넷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HIBERNATE IN LIBRARY
단순하고 소박하게
잉여 인간을 벗어나다 (..
추리소설 1000권 읽기! ha..
Closed
.
Love calling Earth : ..
Null Model
은하수를 여행하는 스트..
웅이네 방
일본에 먹으러가자.
秘するが花
Trivia
WALLFLOWER
Crooked House (..
the world is naked.
디지털을 말한다 by oojoo
한일 아이돌 뒷담화 온..
♠후리지아 향기처럼♠
v e r . b e t a
The Phantasist
卷き戾しの街
뭐 별 거 안 하는 블로그..
사는 이야기~
Pepe
Schubertiade
자유분방 / 殺身成戱
어스름한 달빛에 취해
§ 응!! §
차이컬쳐
이제는 없는 공주를 위하여
나르키
주로, 텍스트의 공간
isao의 IT,게임번역소
산하의 썸데이서울
사색의풍경
다이나믹 부산
witched little tiny hut
Dj ccuri의 림보니카니아
blogger jely
Sion, In The 3rd Dim..
누구의 것도 아닌 집
漁夫의 'Questo e quell..
Neverland

http://studioxga.net..
무명
Surviving in Australia
중급 애호가의 이런저런..
Lifelog
kumakuma memory ..
starla's trash can 혹..
Fithelestre in an Egloo
Life is hard when you..
골룸의 골방
다시 숲
てるてるx小女
.
無爲徒食
maniacs
AURA's Showcase
Photo archive
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ad hoc record
평범한 김차장의 좌충우..
a quarantine station
Cafe Greco
Nomadic-land
D's Notizbuch
리치 커피 올드 패션의 ..
All about IT Trends
이곳은 雨柳堂입니다.
484
외계인 교차점
★ Memo Log !
LoLieL the Black On..
naoya.egloos.com
푸르미 세상
블로그스팟
담 배 가 없 다
drifter
메르카토르
그리고 나의 남은 이야기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블로그
Bistro Fishbowl
하이드
white table
아뿔싸! 지구에서 살다...
딸기밭은 영원히!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ㅁ-
묵색 혹성
한글이 꿈틀
モモのカンヅメ
쭈르르'스 이글루
손안의책 편집부입니다
[칼럼니스트]
날개를 펴는 곳
변천 Komix
이전
品절
허클베리 핀의 모험
woody's film review
bono
알라딘의 Coool~하게..
꼬냉이 야옹 야옹 *^o^*
33.GONY
두근두근 라이프
dayBYday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
Seek Your Daimonion
Kindred Spirits - 빨..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Dust's house
conan's lazy blogging
레스톨 블로그
더러운 물 속에서
아돌군의 잡설들.
로망의 연금술사
행복한 짐승
: 숨어있기 좋은 방 :
Black or White
High enough!
리비에라를 쏴라
주 모씨의 이바구별곡
쿤데라 할아버지도 못이룬..
ms.b.adler's-I.T.U..
동남아시아 11개국 Chan..
모리제의 일본생활
역설의 제 12 우주
사람은 의외로 멋지다
Nanna's memory
레인블루 :: 책과 영화 ..
이공간 [異契褸雅粹透..
월간 키노 KINO 인덱스 ..
1+1=2
For the great stone f..
쓸데없는 것들의 박물지_
╔☺ ♫♪ 유치짬뽕 샤..
英雄本色
후랭클리 스피킹
잉여력27년
양을 쫓는 모험
Jeimian in Okinawa ..
23시 59분의 잉여로운 잡담실
그냥 사람이 사는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도로시
김부장의 가구 만들기
낭만주의자의 취향
寂兮寥兮
DICKHOUSE
finnegans cake
b군, m양을 만나다
.
뿔언니의 쓰잘때기 없는..
허주사우르스
zizek
hanuol blog
新 YoRoZU放談
ひるの幻、よるの夢
애자일 이야기
Homo Peregrino in the..
poeme electronique
커피광 낙서광
Backstage
QUELPART
Like a Complete Unk..
ex
펠레아스의 이글루
좋은 것만 좋아
How I Learned To Sto..
새로운 것은 언제나 신나게..
the Sputnik Sweethe..
무재칠시(無財七施)
예술영화전문블로그 씨..
Fantastic world
괜스레저렇게
thru and thru
Lost and Found
나의산행기
밤의 열두 시간
O.O
-
참 쓸쓸한 당신의 독
여보게저기저게보여
mocca
Make it count. Meet m..
다섯번째 방
정치는 현실입니까?
안녕하세요
hongahn.me
youlhwadang 'librar..
...............
PLAYGROUND
Hey Julie
joooh
Post Gun-in era
숨은 방
베를리너에서 서울리따로.
앤잇굿? Since 2007
steal life
수줍은 느낌의 미소
.
I'm Not Joking
~Floating Paradise~
dunkbear의 블로그 3.0
FLOW
시사만화 '골판지'
The Last Order
Secret Chamber
SEOUL-in
words can hurt you
♨ 영혼은 죽지않아- 하..
crisp
인생이란 필드의 문화기술지
arctic letters from lon..
wanna be a free man.
클래식 음악 노트
Jiy
잘나가는 꼬마사자의 사파리
이글루 파인더

포토로그

D E L I U S
태그
캐브랑리박물관 팡테온 프랑스여행 들라크루아미술관 오르세 베르사유궁전 퐁텐블로성 일랴세갈로비치 세갈로비치 파리건축박물관 뱅센 파리여행 베르사유 그랑트리아농 키스해링전 퀴리박물관 퐁텐블루 기메박물관 오르세미술관 얀덱스 퀴리뮤지엄 키스해링 일리야세갈로비치 클뤼니중세박물관 베르사이유궁전 파리 쁘띠트리아농 퐁텐블로 로댕미술관 퐁텐블루성
전체보기
rss

skin by Ho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