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그러면 무엇이 지도가 할 일인가
  ... 그러면 무엇이 지도가 할 일인가. '차폐'(遮蔽)와 '과장'(誇張) 이 두 가지 단어면 충분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저 혼자의 의견이 아니라 면면히 이어져온 지도의 역사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지구상에서 지도를 사용하는 사람은 주로 도련님이나 그 부친 같은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 예를 들면 새나 벌, 또는 어떤 보행성 동물들처럼 환경을 늘 입체나 공간으로 파악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이런 것을 유클리드적 인지라느니 하는 거창한 말로 바꿔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요). 결국 인간의 경우에는 자기 주위의 환경을 그 '공간'에 대한 이미지를 통해 파악한다는, 이른바 현실의 풍경 이외에도 '마음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서도 저마다 '지도'는 묘하게 다릅니다. 예를 들어 A에서 B까지 이동할 때 최단 루트를 선택한다 해도 각자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애써 의도하지 않은 경우에는 반드시 '최근접의 원칙'이 타당하다는 것이 예로부터 우리 지도에게는 불변의 진리였습니다. 간단하게 설명 드린다면 인간이 무슨 일을 할 때 여러 개의 선택 항목이 제시되면 반드시 가장 힘들지 않은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있는데도, 그리고 물리적으로는 최단 루트는 하나일 수밖에 없는데도 실제 선택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차이가 생기는 것은 이 '마음의 지도'가 만들어내는 편차가 원인입니다.
  편차는 '마음의 지도'란 이미지를 이루는 구성요소에 의해 발생합니다. 가령 출발 지점과 목적 지점에 대한 매력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지점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이 몇 개이며 어떤 형식인가, 루트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선택하는 루트가 매력이 있는가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즉 A에서 B까지 가는 루트를 결정할 때, 물리적인 거리 이외에 익숙한 길이 있는가,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는가, 좋은 느낌을 주는 지점이 있는가 등이 최단거리 우선으로 선택한다 해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중에서, 히라야마 유메아키, 권일영 옮김, 이미지박스, 2008




2007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를 차지한 단편집입니다. 위에 좀 길게 옮겨 적은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은 표제작이면서 2006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은 작품이라서, 다른 작품에 비해 두드러지는 면이 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나는 지갑이다]처럼 지도책이 화자가 되서 이야기를 하는 작품으로 읽는 재미와 결말 처리가 모두 맘에 드는 단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추리작가협회상이라니~ 재미있는 미스터리 단편이겠군! 하시는 분들에게는 "잠깐만!"을 외치고 싶을 정도로 기대와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는 점도 말씀드리고 싶네요. 모두 8편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 잔인한 묘사에 식인과 고문이 이어지는 단편들이라(가끔 유머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만 ^^) "미스터리"에 방점을 찍고 책을 볼까 망설이신 분들은 말리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읽으면서 딱 영화가 상상되는 작품도 여럿 있어 흥미를 끌었는데, 예를 들어 첫번째 수록작인 "에그 맨"은 [양들의 침묵]을, "오퍼런트의 초상"은 [이퀼리브리엄]을, "끔찍한 열대"는 [지옥의 묵시록]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다른 단편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니코친과 소년"을 제외한 나머지 "Ω의 성찬"이나 "소녀의 기도", "괴물 같은 얼굴을 한 여자와 녹은 시계 같은 머리의 남자"는 소설로 읽은 잔인함에 있어서는 하나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클라이브 바커식의 피가 흐르는 듯한 단편과는 또 다른 의미의 잔인함이라는 생각인데 그렇다고 호러로 느껴지지도 않고 뭐라 딱 꼬집어 이야기 하기가 어렵지만, 끈적하게 불쾌한 느낌과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결말을 주는 점에서는 묘한 매력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로 치면 별 다섯이랑 별 한개가 극명하게 갈라지는 식인데, 기괴하고 끔찍한 소설에 흥미를 느끼시는 분에게는 더할나위없는 최고의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p.s. 역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를 차지한 작품 중 국내 출간된 작품의 면면과 비교해보면 이 작품이 1위라는 점에 고개가 좀 갸우뚱 해지는데 2006년 1위가 [용의자 X의 헌신](히가시노 게이고), 2003년 1위는 [사라진 이틀](요코야마 히데오), 2002년 1위 [모방범](미야베 미유키), 1998년 1위 [OUT](기리노 나츠오)과 이 작품을 비교하면 어째서 이 작품이? 하는 의문이 더 깊어집니다. 옮긴이의 말에도 "왜 일본추리작가협회와 각종 소설 순위 결정 투표자들이 이 소설에 표를 던졌는지도 한 번쯤 생각해주시기를 바랍니다."로 맺고 있는데, 제게는 이런 류의 소설에서 상상할 수 있는 한계까지 독자들을 몰아 붙인 점에 한 표를 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고로 원서를 펴낸 光文社에서는 "この作品から日本が壊れていく!"라는 문구를 홍보 패널에 사용하고 있네요. ^^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둘 다 나름 장점이 있지만 기괴한 소설이라는 점에서는 원서표지가 더 잘 어울리는 듯 합니다.
by delius | 2008/06/14 11:06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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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모모깡 at 2008/06/14 12:31
저는 정말 뭐가 잔인한 건지도 느끼지 못하고 재미있게 읽었어요. ^^; 그리고 작가의 뭐랄까;; 회의적이랄까(..와도 좀 다른 듯한) 시선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Commented by delius at 2008/06/14 12:39
- 모모깡님 : 이런 류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저도 재미있게 ^^;;;
Commented by loki at 2008/06/14 19:29
아 전 이거 정말 힘들더라고요. 아는 사람이 사와서 봤는데.
원서표지를 제가 봤다면 안 샀을 것 같아요. 한국판이라면 표지에 속았을지도 모르겠어요.
Commented by delius at 2008/06/14 22:16
- loki님 : [아웃]에 대해 말씀하신 것 생각하면 충분히 힘드셨을 것 같아요. 한국표지는 표제작에 집중한 표지 ^^)/
Commented by keachel at 2008/06/18 00:39
상상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소설이었던듯 싶습니다. 이미 구입했는데 아무생각없이 도전했던 덧글이벤트에 당첨이 되서 한권 더 받게생겼습니다.. (^^;;)
개인적으로는 비위가 강하다 생각했습니다만.. 음식 먹으면서 볼만한 책은 아니더군요..;
Commented by delius at 2008/06/18 10:04
- keachel님 : 카페에 역자분이 "오메가의 성찬" 옮기시면서 고로케를 드셨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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