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요즘 아무하고도 말 안 했어
  '요즘 아무하고도 말 안 했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렇게 씌어 있었다. 받은 내용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손가락으로 무의식적으로 찍은 문장이었다.
  유이치는 얼른 지워버리려다 '일하는 곳과 집만 왕복할 뿐'이라고 덧붙이고, 잠시 망설이다가 보냈다.
  지금까지 외롭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외롭다는 게 어떤 건지 몰랐다. 그런데 그날 밤을 고비로 이제는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외롭다는 것은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길 간절히 바라는 기분일지도 모른다고 유이치는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얘기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자기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


[악인]중에서, 요시다 슈이치, 이영미 옮김, 은행나무, 2008




여러번 밝혔지만 저는 요시다 슈이치빠이기 때문에 -_- 객관적인 평가는 어렵지만, 어쨌든 점점 성장하고 기대보다 한 뼘씩 좋은 작품을 선사하는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요시다 슈이치의 국내 출간 최신작인 [악인]은 이 섬세한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딱 꼬집어 말하기 힘든 감흥을 주는 소설이었습니다. 살인이 이야기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떠오르는 몇몇 소설이 있긴 했지만 읽어가면서 하나 하나 지워가야했고, 그럼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 같은 작품인가? 했는데 역시 그것과도 거리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이전 작품과 아주 다른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참 이상한 소설이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 감탄하기 보다는 씁쓸하고, 살인자인 주인공를 당연스럽게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그 행동에 막연히 동조할 수도 없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는 옮긴이의 말처럼 "요시다 슈이치는 어느새 이런 대단한 작품을 쓰게 되었을까?"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개인적으로 희생자인 요시노와 그의 회사동료 사이의 관계를 그린 초반부의 장면의 정교함에 놀랐고, 끊임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의 목소리와 후반부 유이치의 할머니 후사에가 버스를 타는 모습, 스카프를 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맨 마지막의 유이치가 이야기하는 '피해자'에 대한 부분. 여기서는 한숨을 내쉬어야 했습니다. 요시다 슈이치 작품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뭐냐고 물으면 난감해 하겠지만, 가장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대답은 정해진 것 같습니다. 다음 작품은 어떤 것일지 정말 궁금해 집니다.





p.s. 유이치라는 인물에는 작가의 아래와 같은 배경이 많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었을 때 육체노동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그러다가 글을 쓰는 정신노동의 세계에 들어서니 어떤가? 음… 몸을 쓴다는 게 곧 머리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육체노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내게 큰 경험이 되어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나는 ‘움직이는 것은 진실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글쓰기에서 진실을 찾으려 노력한다.


[필름2.0]과의 2006년 08월 02일 인터뷰 중에서


p.s. 번역본과 원서 표지. 마이니치출판문화상 수상으로 띠지가 2종류가 되었네요~

by delius | 2008/06/03 00:22 | underline | 트랙백(1) | 핑백(3)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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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 ♫♪ 유치짬뽕 샤.. at 2009/01/05 10:28

제목 : 악인 :: 요시다 슈이치
"자네, 소중한 사람은 있나?" 요시오의 질문에 쓰루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람이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자기 자신까지 행복해지는 사람." 요시오의 설명을 들은 쓰루다는 고개를 저으며 "……그 녀석도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 "없는 사람이 너무 많아."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more

Linked at D E L I U S.. at 2008/11/06 00:58

... 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누가 썼는지 가리고 읽어도 요시다 슈이치 소설임을 알아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시다 슈이치 팬들에게는 늘 그렇듯이 적극 추천입니다. [악인]을 떠올리게하기 보다는 (이야기의 연계성은 없지만) [일요일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p.s. 번역본과 원서 표지 ... more

Linked at D E L I U S.. at 2008/12/20 00:18

... - 나이팅게일의 침묵 / 제너럴 루주의 개선 - 돌아보지마 - 미식예찬 - 방황하는 칼날 - 불안감에 시달리는 소년 - 살인의 역사 - 서라벌 사람들 - 아주 사적인 시간 - 악인 - 어쩔 수 없는 물 - 푸른 알약 - 플라워 오브 라이프 - 황금을 안고 튀어라 올해 제가 읽은 최고의 소설~선정후기 : 올해도 일본소설 편식이 심해졌는데, 작년에는 ... more

Linked at D E L I U S.. at 2010/03/04 10:07

... ] 중에서, 요시다 슈이치, 이영미 옮김, 은행나무, 2009 전 요시다 슈이치빠니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 이 책도 좋지만 아직까지 개인적인 1위는 [악인]이군요.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원제는 주인공 이름인 요코미치 요노스케에요~ ... more

Commented by 스내플 at 2008/06/03 10:16
은둔형 외톨이..인건가요? ^^
Commented by delius at 2008/06/03 11:03
- 스내플님 : 아니에요~ 유이치는 차를 좋아하는 육체노동자랍니다~
Commented by 수집 at 2008/06/03 14:12
마지막 장면 읽고 어찌나 가슴이 묵직하던지요.
Commented by delius at 2008/06/03 18:40
- 수집님 : 흑흑 저도요 ㅠㅠ
Commented by honeytaste at 2008/06/05 02:37
아아 정말 좋아하는 소설입니다. 사실 '악인' 읽기 전까지는 요시다 슈이치에 대해 갸웃갸웃 했었는데-_-; 이 작품을 계기로 팬모드로 변했습니다. 중반까지 등장인물이 지나치게 많이 나오는 게 아닌가 했는데 이야기 가락들을 잘 엮더군요. 대도시에서 대화 없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마음 여린(그에 대한 발현방식은 다양하지만서도...)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섬세하게 잘 잡아냈다고 생각했어요. 약장사에게 사기당한 유이치 할머니가 (스카프에 의지해서) 발끈하는 장면에서 눈물 날 뻔. 매번 더 좋은 작품을 선사해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Commented by delius at 2008/06/06 11:28
- honeytaste님 : 아 저는 원래 좋아했는데 이렇게 새로운 작품을 발표해서 더 좋아하게된 경우에요 ^^ 어찌보면 이전 작품들이 있었기에 이런 작품이 나왔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도 그 장면 인상적이었어요. 스카프 사는 장면도 기억에 남아요 ^^
Commented by keachel at 2008/06/08 19:44
이 책 읽기전에는 '퍼레이드'를 가장 좋아했었는데. 순위가 바뀌어버렸습니다.. 읽으면서 마지막에 많이 슬펐습니다. 여주인공의 독백 한마디가 그렇게 가슴을 직격할 줄은 몰랐어요. 둘이 도망칠때는 끝이 어떻게 될것이라고 예상을 했지만 그래도 도망가서 둘이 잘 살기를 바랬습니다..
나오는 사람중 누가 악인인지.. 작가는 명확한 대답을 안해주어서 기억에 많이 남더군요.
Commented by delius at 2008/06/09 13:38
- keachel님 : [퍼레이드]도 좋았고 저는 최근에는 [나가사키]도 무척 좋았어요. [악인]은 또 다른 의미로 요시다 슈이치 소설다운 생각도 들었구요. / 네 저도 마지막 부분 보면서 그런 생각했습니다. 언제 그 느낌이 사라지거나 바뀔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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