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책을 읽는다는 건
... 몇 년간 만년필을 모은 적이 있었다. 프랑스의 벼룩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내 앞의 어떤 남자가 판매대에서 펜을 집어 들고 살펴보았다. 흰색 육각별이 뚜껑에 새겨진 게 한눈에 봐도 몽블랑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나는 멈춰 서서 마음속으로 읊어대기 시작했다. 내려놔. 사지 마!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 그 인간은 오히려 더 열심히 살펴보았다. 나는 놈이 그 자리에 쓰러져 죽기를, 그래서 그의 힘 빠진 손아귀에서 만년필을 빼앗아 올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는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내 증오가 너무 강렬해서 그의 몸을 관통했는지, 갑자기 펜을 내려놓고 겁에 질린 눈을 하고는 어깨 너머로 나를 흘낏 보더니 허둥지둥 가 버렸다. ...


... "책을 읽는다는 건, 적어도 제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과 비슷해요. 좋은 책이라면 기분이 편안해지면서 다음에 무얼 만나게 될지, 저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고 싶어지죠. 하지만 별볼일 없는 책은 뉴저지 주 시커쿠스에 가는 거랑 비슷해요. 냄새도 지독하고 이쪽에 온 게 후회되고.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까 얼른 차 창문을 올리고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입으로만 숨을 쉬어야 하죠." ...



[웃음의 나라]중에서, 조너선 캐럴, 최내현 옮김, 북스피어, 2006




정확히 줄거리는 아는 게 없었지만 그 동안 재미있게 읽은 출판사에서 내는 책이기도 하고 [벌집에 키스하기]가 재미있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망설임없이 [웃음의 나라]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라? 이 책 재미있네! 하면서 계속 읽어나갔는데 뭔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지 잘 모르겠어.. 하면서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딱 209쪽의 그 장면 부터 어라? 이야기가 어찌 흘러가는거야? 하면서 다시 또 집중해서 읽어 나갔습니다. 이런 경우가 흔하지는 않지만 저는 전반부는 너무 너무 좋았고, 후반부는 흥미롭네 했다가 마지막 결말은 악! 이게 뭐야!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위에 밑줄 그은 부분도 다 전반부에요.) 특히 마지막 장면 처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군요. 스포일러성이라 구체적으로 언급은 못하겠지만 아니 어떻게 그렇게 외면하고 그런식으로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맺을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판권란을 보니 1980년 소설인데 이후 발표한 소설에서도 혹시 이런 식의 결말을 내리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점만 빼면 너무 재미있고 흥미로웠습니다. 조너선 캐럴 책을 더 읽어볼지는 좀 더 고민해 볼랍니다.




p.s. 조너선 캐럴 공식사이트 : http://www.jonathancarroll.com/


p.s. 번역본과 원서 표지. 번역본 표지에도 강아지가 조그많게 그려져 있네요~
by delius | 2007/11/11 22:00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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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euphemia at 2007/11/12 01:29
이 작가는 만년필 변태였군요. ^^; 전 아직 [웃음의 나라]를 읽지 않았는데, [벌집에 키스하기] 에서도 거한 만년필 타령이 등장한답니다.

실은 delius 님의 감상을 보고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가능한 한 [벌집에 키스하기]의 스포일러를 안 하려고 애쓰면서 써보기로 하겠습니다, 으음. (...) [벌집에 키스하기]의 문제점이라면 역시, 디테일이 매혹적이지만 전개(와 결말)가 유치하고 갑작스러울 수 있다는 점, 여주인공 및 대부분의 여성 등장인물이 진짜로 '이상하다'는 점, 그 이상한 여성 캐릭터가 대부분 화자가(실은 작가가;;;) 긍정적이고 가깝게 바라보는 캐릭터들이라는 점 등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혹시 [웃음의 나라]의 문제점도 비슷한 종류의 것인가요? 이 작가 좀 더 볼까 말까하는 갈림길에 서 있어서요. ^^;;;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아, 전의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을 일단 구해 놓았습니다. 아직 시작은 안 했어요. :)
Commented by delius at 2007/11/12 08:24
- euphemia님 : 홍홍 만년필 변태~ / 아 저도 가급적 스포일러성 이야기를 언급하기 않고 이야기 해보면 비슷한 것 같습니다. 후반부의 전개가 좀 갑작스럽고 유치한 결말부분이 그래요. 특히 여성 캐릭터에 대한 부분 중 가장 이상했던 것은 바로 문제의 결말 부분인데 독자의 만용이긴 하지만 "아니 왜 그러는 거에요... 그냥 그렇게 끝내버리면 끝인가요?"하고 캐릭터 대신 작가에게 호소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저도 갈림길인데 정말 비슷한 종류의 내용이 있는지 [벌집에 키스하기]를 한 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 (와~ 어떻게 보실지 너무 궁금해요~)
Commented by keachel at 2007/11/12 21:33
내용이 재미있는데요~
대사가 너무 끌립니다!! 지금 읽고있는 '암흑관의 살인' 을 읽고나면 읽어봐야겠어요~
엔딩이 묘하다는게 좀 걸리지만.. 저 만년필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관심도 업! 이랄까요.. ^^;;
Commented at 2007/11/13 02:2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delius at 2007/11/14 00:48
- keachel님 : 네 저도 이부분은 쏙 맘에 들어요 / 오 그 세 권 다 두껍다는 [함흑관의 살인]을 읽으시는군요~
- 비공개님 : 메일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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