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일본전쟁화
  ... 나는 침략전쟁에 반대하고 화가의 전쟁협력을 비판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떤 예술작품과 마주했을 때, 내가 사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양해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섰을 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끌리는 경우가 이따금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그렇게 내 존재의 기반 자체를 뒤흔들 수 있을 만큼 악마적인 힘을 가진 예술작품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커다란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후지따의 전쟁화를 처음 볼 때까지는 그런 기쁨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전설적인 작품 앞에 서보니, 과연 솜씨가 좋구나 하는 정도의 감개밖에는 솟아나지 않는다. ...
  ... 나도 원칙적으로 전쟁화를 전면 공개하는 데 찬성한다. 다만 그것은 '정치'에 의해 봉인되어 있는 '명작'을 해금하라고 외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순전히 예술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일본전쟁화에는 예술적 가치가 모자라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이제부터라도 '화가 오따꾸'들의 전쟁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책임을 회피하는 국민적 공모관계가 점점 공고해지고, "우리나라 역사를 자랑하라"는 탁한 목소리까지 줄기차게 들려오게 된 현재의 일본 사회에서 전쟁화가 과연 내가 말하는 의미에서 '정당하게' 평가될지, 자신은 없다. 어쩌면 일본인들은 또다시 전쟁화 앞에 헌금함이라도 놓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후지따 쯔구하루 "싸이판 섬 동포, 신절을 다하다"(1945) 중에서", [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서경식, 김석희 옮김, 창작과비평사, 2002




일본의 침략전쟁시기에 일본내에서 군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화가들이 그려낸 전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용을 보면 이 전쟁화 중 대표작 153점은 패전 후 미군에 접수되었다가 1970년에 '영구대여' 형식으로 반환되어 현재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네요. 그 중 전설처럼 이야기 되던 후지따 쯔구하루의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의 감상을 소개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라 밑줄을 그었습니다. 서경식씨의 다른 책처럼 차분하게 자신의 견해와 감상을 밝히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림과 화가에 대한 이야기 한 편 한 편이 모두 인상적이네요.




p.s. 여전히 창비 나름의 표기법(피카소 = 삐까쏘)은 불만이지만, ㅡ.ㅡ 2002년 나온 책이 지금봐도 세련되어 보인다는 점에서 칭찬해 줄 수 밖에 없네요. ^^
by delius | 2007/09/15 12:17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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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루시엔 at 2007/09/15 12:28
읽어 보고 싶은 책입니다. 파란 문구가 아주 인상적이네요.
점잖고 단정하고 논리 있는 어조를 좋아합니다.
delius님의 감상을 읽고 나니 더 읽고 싶네요....

그런데 역사를 미화하려는 것은 일본뿐이 아닐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는 제 블로그에서 논쟁을 하는데

'국가는 인과응보의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도덕을 초월해 있다,
이해관계에 따라서 움직여야 하며 이 때문에 역사를 조작/미화해
가르쳐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더군요.

무엇보다 놀란 건 그 분이 평소에 온건하고 점잖은 분이셨다는 게 아니라
그 분의 논조에 동의하시는 분이 상당수 계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십 년을 남의 나라 침략에 애통을 겪었던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 조작에 비분강개하는 심정을 가지는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저에게는 너무 놀라웠습니다.

데쓰노트가 손에 들어오면 사람도 죽이고 무적 병기가 있으면 전쟁도 하고
신고 당할 염려 없으면 정말 뭔 짓이던 하겠구나 싶었어요.

어쩌면 그 사람들이 화내는 것은 "우리가"당해서 화내는 거지
그게 올바른 일이 아니어서 화내는 게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무서운 일입니다.
전쟁이 막 끝났을 때는 이러지 않았을 텐데요.
Commented by delius at 2007/09/15 16:43
- 루시엔님 : 네. 서경식의 책을 몇 권 읽어봤는데 - 그런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 언제나 단정하고 논리적인 어조인 것에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뉴스의 덧글들이 그 나름의 효용(?)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악의든 의도적인 것이든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식의 반응들이 눈에 띄고 또 그것을 추천하고 동감하는 모습을 보다보면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죠. / 정말 세상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Commented by joyce at 2007/09/15 21:26
말씀하신 불편함 때문에 창비 책 안 사본 지 오래되었습니다. (도무지 집중이 안 된다는)
Commented by delius at 2007/09/15 21:43
저는 "저러면 피카소 검색했을 때 안나올거 아냐!"하면서 걱정이 되더군요... 인쇄본 책만 낼꺼라는 자신감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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