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돌이킬 수 없는 일
... 거짓말을 하는 엄마와 신경 쓰지 않는 척하는 나. 내가 유치한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엄마와 나의 인간관계가 뿌리 끝에서부터 무너져 가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엄마를 신뢰할 수 없지만, 신뢰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떄문에 신뢰라는 것 자체를 다듬어 고쳐야만 한다.
  나는 아빠를 멀리하게 되었다. 엄마에 대한 억제된 증오가 아빠를 향해 분출된 것이다. 사실은 밉지만, 직접적으로 엄마에게 터뜨릴 수 없는 것은 내가 아직 엄마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는 아빠대로, 아마도 같은 이유로 엄마에 대한 증오를 우리들에게 향했다. 뒤틀린 증오가 오가며, 나는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나는 엄마에 대한 불신을 어떻게든 감추어 엄마를 믿고 사랑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파탄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내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부모의 학대라는 것은 분명 이러한 구조일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를 믿지 못하게 되어도 받아들이게 되는 아이는 언젠가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된다.
  봐라, 미미즈.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엄마를 죽이는 일 따위가 아니야.



[리얼월드] 중에서, 기리노 나쓰오, 윤혜원 옮김, 마야, 2007




책 뒷편에 써있는 문구. "고3 여름방학, 호리닌나라고 불리는 야마나카 도시코의 옆집 소년이 엄마를 살해하고 도주하다!" 소설은 이 야마나카 도시코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친구 3명과 옆집 소년(미미즈)의 각각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마지막은 다시 도시코의 시선에서 끝납니다. 처음 시작은 정말 기리노 나츠오 소설 답지 않게 가벼운 느낌이 들어서 "아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라서 이전과는 좀 다른 느낌이네~"하고 주인공 도시코의 말에 키득키득 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는 미미즈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에 가서는 "아... 당신은 역시 변함이 없군요 Orz"하고 긴장하며 읽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미미즈의 심리 묘사와 범행장면 묘사는 [아웃]의 그것(그거 있잖아요.. ㅡ.ㅡ)을 훨씬 뛰어 넘는다는 생각인데 다시 그 부분을 펼쳐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입니다.(정확하게 같은 느낌은 아니겠지만 제가 [천상의 피조물]을 자막도 없이 NHK에서 방송해준 것을 말귀하나 못알아 듣고 본 것이 꽤 오래전인데도 그 후반부 장면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것과 비슷해요.) 


이전 작품 [아웃]이나 [그로테스크]를 읽은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이 작품도 여자 4명과 남자 1명이라는 주인공 구도를 가지고 흘러가는데 평론가는 "아마도 동성 4인조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필요한 최소 단위"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분석을 포함해서 해설은 기리노 나츠오 소설을 관계 문학이라고 정의하고 소설의 특징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냥 막연하게 "기리노 나츠오 소설 = 구원없음" 정도로만 보고 있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소설을 보는 눈이 뜨인 기분이더라구요. 아래 그 부분을 잠깐 옮겨봅니다.


... 기리노 씨는 아무래도 처음에 치밀한 플롯을 세우고, 거기에 살을 붙여 나가는 소설을 쓰는 타입의 작가는 아니다. 캐릭터를 조작하는 사이에 처음에는 예상도 하지 못했던 관계성이 보여,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기리노 씨는 그 과정을 교묘하게 작품에 도입한다. 이것은 자주 언급되는 '캐릭터의 혼자 걷기'라는 사태에 가깝다. 단, 기리노 씨의 경우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은 인물만이 아니라고 한정할 수 없다. 마치 관계 그 자체가 자율성을 획득해 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


기리노 나츠오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에게는 (늘상 하는 이야기지만) 적극 추천합니다. 단 존속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이런 쪽의 내용을 피하시는 분이라면 피하시면 좋겠습니다.


 

p.s. 갑작스레 황금가지에서 기리노 나츠오 작품을 쏟아 내기 시작해서 다른 출판사에도 작품이 나오는지 미쳐 몰랐습니다. 판권란을 확인하니 2007년 4월 출간. 생각난 김에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 보니 [그로테스크] 이후 다음과 같은 순으로 출간되었네요. [아임 소리 마마](황금가지) - [리얼월드](마야) - [아웃](재출간, 황금가지) - [잔학기](황금가지) - [암보스 문도스](황금가지) - [다크](비채) 순. 2007년 상반기 동안 무려 5권이라니 일본소설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p.s. 원서표지와 국내판 표지. 원서표지가 더 좋아요.
by delius | 2007/06/18 00:24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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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유하 at 2007/06/18 02:24
인용구가 강렬한데요(웃음)
일본소설은 취향의 경계가 미묘해서 선뜻 읽기 힘들던데 이 책은 한 번 읽어보고 싶어져요^^
Commented by 냉이 at 2007/06/18 09:32
키리노 나츠오씨 책이 생각보다 많이 출간되었군요. 좋아하는 작가이긴 한데.. 전 이상하게 쉽게 쉽게 손은 가지 않더라구요.. 좀 단단히 마음 먹고 읽게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나 할까. 리얼월드는 생각보다 늦게 국내에 소개되었네요. 아웃이나 그로테스크랑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전 이 작가 작품 중에서 부드러운 뺨(柔らかな頬)과 얼굴에 내리는 비(顔に降りかかる雨)가 아직까지도 베스트입니다.
Commented by delius at 2007/06/18 10:11
- 유하님 : 네 강렬합니다. 대단한 작가에요~
- 냉이님 : 저도 [부드러운 볼]을 베스트로 꼽고 싶습니다. 이번에 [다크]를 번역한 권일영씨는 [리얼월드]에 대해서 [그로테스크] 보다는 아래, [아임소리맘]보다는 위~라고 평가하셨던데 저도 비슷. [얼굴에 내리는 비]도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어요~
Commented at 2007/06/18 10:1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delius at 2007/06/18 11:14
이것도 다 날로 먹는 포스트의 일종인 것이지요. 밑줄을 빙자해서 슬쩍 다른 사람 글로 내용을 채우는... =.= / 비공개님의 장문의 포스트에 비하면 제것이야 말로 메모 수준입니다.
Commented by midori at 2007/06/18 17:06
현재 <아웃> 읽고 있는 중입니다. 분량이 만만찮아요.
Commented by delius at 2007/06/18 20:19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
Commented by 지구인 at 2007/06/19 20:19
이런 자칭이신 '날로 먹는 포스트'도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중요한 사실이지요. 흑흑... 일본어 공부 잘 되시나요? 저도 이제 다시 정신차리고 공부하려구요..
Commented by delius at 2007/06/20 10:05
^^;;; / 아 말씀하신 날짜 숫자 시간을 공부하고 있는데 장난이 아니군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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