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후회하는 일 없으세요?
"사장님."
"뭐?"
"사장님은 후회하는 일 없으세요?"
당돌한 질문에 노리코는 잠시 당황했다.
"당연히 있지."
"정말이에요?"
"없는 것처럼 보여?"
사에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고 자신의 발로 인생을 걸어온 것처럼 보여요."
"어머, 어머."
노리코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식으로 보이는구나."
"아니에요?"
"후회라면 죽을 만큼 했어."
"정말로요? 예를 들면 어떤 거요?"
"글쎄, 그때 결혼했으면 좋았을걸. 성질 급하게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맨션을 사는 것이 너무 빨랐구나. 뭐 이런 것들이지. 자잘한 것들까지 들자면, 셀 수조차 없을 정도야."
"그래요?"
"하지만 제일 후회되는 건 말이야."
사에가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째서 좀 더 나의 삶에 대해 자신감을 갖지 못했나, 하는 걸 거야."
노리코는 사에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말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만약 그 때 그렇게 했더라면 하고, 또 하나의 인생을 멋대로 상상하면서 그것에 질투하는 거지. 언제나 내가 살지 않은 쪽의 인생에 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말이지. 사실 그런건 아무데도 없는데 인생은 한쪽 길로 밖에 갈 수 없는 것인데 말이야."
"왠지 알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래?"
"아직 뭐 크게 대수로운 인생을 산 건 아니라서, 제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좀 건방질 지 모르지만요."
"아니야. 안 그래. 내가 사에만 한 나이 때는 더 건방졌어."
차창 밖으로 돌린 눈 속으로 바경치가 흘러가고 있었다.



[매리지 블루], 유이카와 케이, 서혜영 옮김, 문이당, 2005




20대부터 60대까지 여성 2명을 주인공으로 일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소설. 옮긴이도 말하고 있지만 "너무 식상한 스토리 아니야 게다가 그 긴 세월의 이야기를 이 짧은 한 권에 다 담다니, 그래가지고서야 어느 한 순간인들 제대로 잡아낼 수 있겠어?"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유이카와 케이는 이 두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적절하게 직조해 나가면서 느슨해지기 쉬운 식상한 이야기를 놀랄정도로 흥미롭게 만들어 나간다.


책을 읽으면서 책 내용 보다는 딴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는데, 여성들이 일이냐 결혼이냐 정도의 수위의 인생에 대한 고민에 해당하는 남성들의 그것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남성들의 경우 결혼은 당연한 것이고, 그 이후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냐 아니면 그냥 밥벌어 먹으며 사냐 정도의 고민을 하는 것 처럼 보이는데 그 갈등이 여성들만큼 크다는 생각이 별로 안든다. 그냥 인생에 대한 고민 차원으로 본다면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단숨에 읽히는 소설로 이런 대조적인 주인공을 다룬 이야기의 정점을 [어깨너머의 연인]이라고 한다면 이 작품은 그곳으로 바로 아래 있는 산장같은 느낌이 든다. 유이카와 케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성별에 관계없이 내 인생은? 이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p.s. 본문에 2번이나 "면제부"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원래 일본에서는 "면죄부"를 면제부라고 하는지 궁금하네요. 아님 그냥 오타?


p.s.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읽은 유이카와 케이 소설의 재미정도 ^^


[어깨너머의 연인] = [백만번의 변명] > [매리지 블루] > [점점 멀어지는 당신]


p.s. 원서 표지. 원제는 [영원의 도중 永遠の途中]. 제목인 매리지 블루(marriage blue)는 책날개에 의하면 "결혼을 앞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심리 불안 현상"이라고 한다. 출판사에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원서 표지가 훨씬 이쁘다. *_*
by delius | 2006/11/15 21:17 | underline | 트랙백 | 핑백(1)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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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D E L I U S.. at 2008/10/26 23:03

... 김성기 옮김, 이레, 2007 [어깨너머의 연인]과 [백만번의 변명]으로 이제는 줄거리를 떠나서 작가 이름만 보고 그냥 읽게 된 유이카와 케이의 작품. 다른 작품, 특히 [매리지 블루] 처럼 대조적인 두 여성(이번 소설에서는 피가 섞이지 않은 자매 리리코와 유키오)이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점과 혈연이 아닌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 more

Commented by joyce at 2006/11/16 00:04
아... 이와 비슷한 니체의 구절이 있는데 잘 안 떠오르네요.^^
'가장 후회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너 자신의 비열함을 쉽게 믿은 것. 너를 낮게 평가한 것.' 뭐 그런 류였던 것 같은데...;;
Commented by tamguman at 2006/11/16 01:09
오...이 책은 꼭 봐야할 책일 듯.
Commented by delius at 2006/11/16 09:48
- joyce님 : "너 자신의 비열함을 쉽게 믿은 것" / "너를 낮게 평가한 것" 흑흑
- tamguman님 : 네 재미도 있습니다~
Commented by 지구인 at 2006/11/16 23:03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멋대로 상상하고 질투한다는 표현이 가슴에 콱 꽂히네요...
Commented by delius at 2006/11/17 09:12
흑흑 저도 콱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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