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지우개로 지우지 않으면 노트는 다시 사용할 수 없다
... 내버려두면 좋겠어. 아이코의 뇌는 바로 앞의 일밖에 생각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위험을 피해야 한다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지우개로 지우지 않으면 노트는 다시 사용할 수 없다. 새 노트를 사주지 않아서 아이코는 몇 번씩 지우개를 사용했다. 잘 지우지 않으면 노트는 더러워져서 마침내 찢어진다. 그렇게 하는 동안 어차피 지울거면 처음부터 쓰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어서 수업 중에도 노트 필기를 하지 않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아이코는 지식이나 경험을 축적하여 사고하는 습관을 아주 깨끗이 잊어버렸다. 녹초가 될 정도로 더운 한여름에는 옷을 입으면 땀만 흐른다며 빨래하는 걸 귀찮아하던 창녀 언니들은 슬립 한 장만 걸쳤다. 그것과 똑같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과거의 연줄을 이용하고, 이용할 가치가 없어지면 지워버린다. 그렇게 하면 아주 깨끗한 노트로 살 수 있으니까 자신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어쨌든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그러니까 과거의 인간관계를 이용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결국 타인이기 때문에 어떤 번거로운 일이 생기거나 귀찮아지면 그만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해버리기 때문에 처리해야만 한다. 그래, 그래, 그런거야 하고 아이코는 간단하게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이 아이코가 살면서 깨달은 지혜였다.


이럴 때 문득 생각하게 되는 건 상대가 타인이 아니라 피가 섞인 가족이라면 어떨까 하는 가정이었다. 어린 시절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이 하늘 아래 어딘가에는 자신이 진짜 집이 있고, 그곳에서 아빠와 엄마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 적도 있었다.


만약 새 노트가 많이 있어서 지우개로 지우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자신이 쓴 것과 공부한 것이 쌓이고 쌓여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왠지 그런 일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자신에게 아빠와 엄마라는 사람이 있어도 이용하고 귀찮아지면 부정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



[아임 소리 마마], 기리노 나쓰오, 이은주 옮김, 황금가지, 2006





어쩌면 이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우리에게 들이미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도 주인공에게 구원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네요. ㅜㅜ 기리노 나츠오 팬이라면 좋아할만한 작품이지만 분량이 국내 출간된 다른 작품에 비해 반밖에 되지 않아 조금 아쉽다는 생각도 듭니다. 기존 밀리언셀러클럽 소설을 생각하시고 책을 고르신다면 이 책이 추리소설에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요소를 많이 홀대하고 있다는 점을 참고해주세요. ^^




p.s. [아미 소리 마마] 일본 공식 사이트 : http://www.shueisha.co.jp/kirino/. 옮긴이이의 말에 언급된 사마토 다마키와의 인터뷰 전문이 실려 있다. 이정도 정보는 책에서 줄 수 있을법 한데 배려가 아쉽다.


p.s. 원서표지
by delius | 2006/10/31 19:08 | underline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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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tamguman at 2006/11/01 00:20
책커버가 왠지 파격적이에요. 호잉~
Commented by delius at 2006/11/01 09:39
홍홍 내용도 좀 파격적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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